성기운(成岐運)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관료이자 조선귀족이다. 1847년 12월 10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노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봉서(鳳瑞), 호는 건제(健齊) 또는 치암(痴菴)이다. 1924년 11월 27일 사망하였다.
관료 경력
1880년(고종 17) 문과 증광시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승정원 가주서, 승문원 부정자 등을 지냈다. 1884년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으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약 1년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였다. 귀국 후 홍문관 수찬, 형조 참의, 좌부승지, 한성부 소윤, 인천부사 겸 감리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상하이 주차 찰리통상사무, 1894년 주차일본전권대신에 임명되었다. 1900년 주차일본전권공사, 1902년 철도원 총재, 1904년 전라남도·경상남도 관찰사, 1905년 충청북도 관찰사, 1906년 경기도 관찰사와 농상공부대신, 1907년 중추원 부의장, 190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역임하였다.
친일 행적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군의 개입을 요청하는 등 초기에는 친청파(親清派)에 속했으나, 이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 세력에 포함되어 친러 성향을 보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몰락하자 친일파로 전향하였다. 경상남도 관찰사 재임 시에는 의병 토벌에 앞장섰으며, 1906년 박제순 친일 내각의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약 체결 협조를 이유로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으며,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수령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주도의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정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조선유교대동회 회장, 1922년 선만협회(鮮滿協會) 총재, 1924년 경학원 대제학을 지냈다.
사후 평가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작위는 아들 성주경(成周絅)이 습작하였고, 손자 성일용(成一鏞)에게까지 이어졌다.
한편, 동명이인으로 성기운(成璣運, 1877~1956)이 존재한다. 자는 순재(舜在), 호는 덕천(悳泉)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유학자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1917년 일제의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 등재를 거부하였고, 이 과정에서 네 차례에 걸쳐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며 옥고를 치렀다. 1928년 공주 달전(達田)으로 이주하여 저술과 학문에 전념하였고, 1953년 충현서원(忠賢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사망하였으며,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의 병산사(屛山祠)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저술로는 『덕천집(悳泉集)』, 『덕천속집(悳泉續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