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성 전투는 193년, 중국 후한 말기 삼국지 시대에 조조(曹操)가 서주 자사 도겸(陶謙)을 공격하면서 발생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도겸의 부하 장개(張闓)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배경
조조는 청주의 황건적 잔당을 흡수하여 30만에 달하는 군사를 확보하고 정욱(程昱), 곽가(郭嘉) 등의 인재를 등용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서주 태수 도겸은 조조와의 친분을 맺기 위해 부하 장개에게 5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조의 아버지 조숭과 가족들을 모시게 하였다. 그러나 장개가 재물에 눈이 멀어 조숭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해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조조는 도겸에게 책임을 돌려 군사를 일으켰다.
전투 경과
조조는 모사 순욱(荀彧)과 정욱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견성, 범현, 동아 등 고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진격하였다. 도겸은 장수를 보내 조조와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도겸의 모사 미축(糜竺)은 구원을 청하기 위해 북해 태수 공융(孔融)에게 갔고, 공융은 평원 현령 유비(劉備)를 지원군으로 추천하였다. 유비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함께 의병 3000명을 이끌고 북해를 포위한 황건적 잔당을 격퇴한 후, 공손찬(公孫瓚)에게 군사 2000명과 장수 조운(趙雲)을 빌려 총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향하였다. 유비는 공융, 청주 자사 전해(田楷)와 합류하여 조조의 포위망을 뚫고 서주성에 진입하였다.
결과
조조가 서주성을 압박하던 중, 여포(呂布)와 진류 태수 장막(張邈)이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兗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조조는 급히 군사를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 도겸과 지원군의 사실상 승리로 전투가 종결되었다.
영향
조조는 이후 여포에게 연주를 빼앗겼으나, 복양 전투에서 승리하여 연주를 되찾았다. 유비는 194년 도겸이 병사하자 그의 부탁으로 서주 자사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195년 복양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한 여포를 받아들였다. 이 전투는 유비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조와 여포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