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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교회 대분열

서방교회 대분열(라틴어: Magnum schisma occidentale, 영어: Western Schism)은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약 39년간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분열 사건을 가리킨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갈라진 1054년의 동서 교회 대분열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사건이다.

배경

이 분열의 직접적 원인은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1309~1377)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충돌(아나니 사건, 1303) 이후, 1309년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약 70년간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이듬해 그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발단과 전개

1378년, 로마 시민들은 다시 프랑스 출신 교황이 선출되어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추기경단의 대다수는 프랑스 출신이었으나, 폭동을 우려하여 이탈리아 남부 바리 출신의 바르톨로메오를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후 권위주의적 태도와 폭언, 폭행으로 추기경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에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한 추기경단은 아나니에 모여 선출 당시 로마 시민들의 강압이 있었다는 이유로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1378년 9월 20일 제네바 출신 로베르를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새롭게 선출하였다. 우르바노 6세가 퇴위를 거부하면서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한 명씩 두 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양상

두 교황은 서로를 파문하였고, 서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을 달리하였다. 프랑스, 아라곤, 카스티야, 스코틀랜드, 나폴리 등은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고,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이탈리아 대부분, 헝가리, 폴란드 등은 로마의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였다. 두 교황이 인사권을 남발하면서 각 지역 교회는 두 명의 대주교, 두 명의 본당 신부를 갖게 되었고, 신자들까지 양측으로 분열되어 유럽 전역에 대혼란이 발생하였다.

종식을 위한 노력

1394년 파리대학은 양측 교황의 동시 사임, 중재 재판소, 공의회 소집의 세 가지 해결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9년 피사 공의회가 소집되어 당시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폐위하고 알렉산데르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합법적인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종결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세 명의 교황(그레고리오 12세, 베네딕토 13세, 요한 23세)을 모두 폐위시키고, 1417년 11월 로마 명문가 출신 코론나 추기경을 교황 마르티노 5세로 선출함으로써 약 39년간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수위설'(공의회 지상주의)이 힘을 얻게 되었고, 교황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는 이후 16세기 종교 개혁이 발생하는 간접적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콘클라베 진행 중 외부 압력과 간섭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원칙이 재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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