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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신라)

서당(誓幢)은 신라의 군단 조직이다. 한자 표기상 '맹세할 서(誓)'와 '기 당(幢)'을 사용하며, 고려·조선 시대의 사설 교육 기관인 서당(書堂)과는 다른 개념이다.

기원과 설치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당은 진평왕(眞平王) 5년(583년)에 처음 조직되었다. 이후 진평왕 35년(613년)에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학계에서는 613년 당시에는 서당 하나만 존재했던 상황에서 굳이 이름을 바꿀 이유가 없다는 점, 그리고 이후 기록에서도 '서당'이라는 명칭이 계속 등장하는 점을 근거로, 실제 개칭 시점은 672년 이후일 것이라는 견해(末松保和)와, 문무왕 13년(673년)이었으나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했다는 견해(盧重國) 등이 제기되어 있다.

조직적 성격

서당은 기존의 중앙군 조직인 육정(六停)과 달리 귀족 출신의 무장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모집한 소모병(召募兵)적 성격을 띠었다. 학계에서는 서당을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특수한 성격의 조직으로 보는 견해(李基白)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당이라는 명칭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誓)'의 의미에 근거하여 호령을 받은 군대, 즉 왕에게 직속된 군대라는 해석(末松保和)과, '서(誓)'의 발음이 '새롭다'는 뜻의 '신(新)'과 통한다고 보아 진흥왕 시기에 편성된 6정과는 다른 새로운 군사 조직임을 나타낸다는 견해(井上秀雄), 병력 모집 단계에서 전쟁 승리와 포상을 선제적으로 맹세한 존재들로 구성된 군사 조직임을 반영한다는 견해(최상기) 등이 있다.

9서당(九誓幢)으로의 발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신문왕(神文王) 때 서당은 대폭 증가되어 9서당(九誓幢)으로 완성되었다. 효소왕(孝昭王) 2년(693년)에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개칭하면서 9서당 체제가 최종적으로 성립되었다. 9서당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군사 조직은 모두 특정한 색깔의 금(衿, 군복에 부착하는 휘장)과 서당(誓幢)을 결합한 형식의 이름을 가졌다.

9서당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녹금서당(綠衿誓幢): 원(原)신라 출신. 진평왕 5년(583) 설치된 서당의 후신.
  • 자금서당(紫衿誓幢): 원신라 출신. 진평왕 47년(625) 설치된 낭당(郎幢)의 후신으로, 문무왕 17년(677)에 개칭.
  • 비금서당(緋衿誓幢): 원신라 출신. 문무왕 12년(672) 설치된 장창당의 후신.
  • 백금서당(白衿誓幢): 백제민(百濟民)으로 편성. 문무왕 12년(672) 설치. 비신라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서당.
  • 황금서당(黃衿誓幢): 고구려민(高句麗民)으로 편성. 신문왕 3년(683) 설치.
  • 흑금서당(黑衿誓幢): 말갈국민(靺鞨國民)으로 편성. 신문왕 3년(683) 설치.
  • 벽금서당(碧衿誓幢): 보덕성민(報德城民)으로 편성. 신문왕 6년(686) 설치.
  • 적금서당(赤衿誓幢): 보덕성민으로 편성. 신문왕 6년(686) 설치.
  • 청금서당(靑衿誓幢): 백제잔민(百濟殘民)으로 편성. 신문왕 7년(687) 설치.

이와 같이 9서당은 원신라 출신자로 편성된 3개, 백제 출신자로 편성된 2개, 고구려 출신자로 편성된 1개, 보덕국(報德國) 출신자로 편성된 2개, 말갈 계통으로 편성된 1개로 구성되어, 통일 이후 신라가 다양한 출신 성분의 인력을 군사 조직에 포용한 특징을 보여준다.

역사적 의의

9서당은 통일 이후 신라의 군사 조직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각 서당에는 장군(將軍) 이하 대관대감, 대대감, 제감, 감사지, 소감, 화척 등의 군관과 군사당주, 보기당주 등이 배치되었으며, 전체 군관의 규모가 다른 군사 조직에 비해 가장 컸다. 9서당의 성격에 대해서는 통일 이후 왕경(王京)에 주둔하며 전제왕권을 뒷받침한 군사 조직이라는 견해(李基白·李基東), 국왕이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조직이라는 견해(盧重國), 나당전쟁 이후의 군사적 긴장에 대응하여 증설되었다는 견해(서영교)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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