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법화사지(西歸浦 法華寺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사찰 터이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제주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국가문화유산포털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등 공신력 있는 자료에 등재되어 있는 실재하는 역사 유적이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맞다.
위치와 지형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해발 160~170m 내외의 완만한 평지에 자리한다. 사역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강정천(江汀川)이, 서쪽에는 중문 한천(漢川)이 흐른다. 뒤편에는 해발 220m 안팎의 언덕 능선이 동서로 뻗어 있고, 앞쪽에는 해발 165m의 구산봉(龜山峰)이 있다.
창건과 변천
법화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삼국시대 해상 교역 시기인 5세기~7세기 창건설, 장보고 창건설, 고려 전기인 10세기~12세기 창건설, 원 간섭기 원나라인의 창건설 등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다만 출토 유물과 발굴 결과를 종합하면 법화사는 고려 시대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비보사찰이란 풍수지리의 일종인 도참설에 따라 중요 지역의 지맥을 보한다는 이유로 세워진 사찰을 말한다.
발굴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 '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을 통해, 법화사가 1269년(원종 10)에 중창을 시작하여 1279년(충렬왕 5)에 완료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중창 이전에 초막이나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초기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14세기 전반에는 원나라의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타삼존불을 봉안하는 전각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이후 조선 태종 때 명나라로 보내기 위해 한양으로 이전되었으며, 이 과정에 수천 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법화사는 비보사원으로서 노비 280명을 소유한 제주도의 대표적인 사원이었으나, 1408년(태종 8)에는 노비 수가 30명으로 축소되어 사세가 약해졌다. 1653년(효종 4)에 편찬된 《탐라지》에는 폐사되었다는 뜻의 '금폐'(今廢)라는 기록이 있으며, 1799년(정조 23)의 《범우고》에도 '금폐'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위키백과에는 18세기 전기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절 세 곳을 불태울 때 법화사가 전소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후 1921년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6년 초에는 제주 관음사의 포교소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제주4·3사건으로 소실된 뒤 1960년대 후반에 중창되었고, 현재 법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인 관음사의 말사로 관리·운영되고 있다. 현 사역의 건물은 1987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발굴 조사
법화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총 8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 조사는 명지대학교 박물관이, 제2차~제8차 조사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이 시행하였다. 조사 대상 면적은 총 2만 8,050여 ㎡였으며, 서귀포시 하원동 1071-1번지 등 총 19개 필지에 걸쳐 진행되었다.
발굴 결과 고려 후기의 금당 터, 10개 동의 건물터, 계단 시설, 보도 시설, 담장 터, 연지 등의 사찰 관련 유구와 군 숙영 시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용봉문 막새, 화문·범자문 막새, 명문 기와, 청자 편, 분청자기 편, 백자 편, 중국 백자 편, 토기 편, '법화경전등잔차양사시주주경'이 새겨진 청동 등잔, 개원통보(開元通寶), 석제 소불 등이 있다. 특히 용과 봉황문 막새는 고려 왕궁지인 개성의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내섬'(內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분청사기와 백자가 출토되어 법화사가 조선 전기까지 사격을 갖춘 사원이었음을 시사한다.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법화사지의 변천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1차 시기(1269년 이전)는 탐라총관부 설치 이전으로 초막이나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2차 시기(1269년~1400년경)에 원과 관련한 건물이 신축되었고, 3차(1400년~1600년경) 및 4차 시기(1600년경 이후)는 조선 시대로 이전 시기의 건물이 허물어진 뒤 신축에 재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화재적 의의
법화사지는 고려 시대 비보압승 정책에 따라 지정된 제주 지역의 비보사원으로, 제주도 동서 및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에 위치한 사찰이었다. 원 황제와 고려 국왕을 축수하는 기원 사원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와 원나라 간의 불교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주요 유적지로서, 제주도에 불교가 유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현재 법화사지 일원에는 발굴 결과를 토대로 대웅전과 연지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사찰 부지는 새로 조성된 법화사가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