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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마네세르 5세

샬마네세르 5세(Shalmaneser V, 재위 기원전 727년~기원전 722년)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으로, 그의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정복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신아시리아 설형문자로 "살마누-아샤레드(Salmānu-ašarēd)"로 표기되며, "살마누 신은 으뜸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 히브리어에서는 "슐만에셀(Šalmanʾeser)"로 표기된다.

왕위 계승과 초기 생애

샬마네세르 5세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년~기원전 727년)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왕세자 시절에는 울룰라유(Ululayu)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울룰루 달에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일부 후대 사료(프톨레마이오스 정경, 바빌로니아 왕명록,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저작 등)에서는 울룰라유 또는 그리스어 변형인 엘룰라이오스(Eloulaios)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의 공식 문서에서는 왕의 이름이 샬마네세르로만 표기되어 있어, 울룰라유가 공식적인 즉위명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왕세자 시절 샬마네세르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여러 외교적·행정적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원정에 나선 동안 님루드(Nimrud)에 머물며 섭정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나, 이는 학자들의 추정에 기반한 것이다.

재위 기간

기원전 727년 테벳 달 25일,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사망한 후 샬마네세르 5세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양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은 채 5년에 미치지 못했으며, 당대의 사료가 극히 부족하여 그의 통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제한적이다.

샬마네세르 치세의 남아 있는 주요 유물로는 사자 형태의 청동 추(錘)에 새겨진 몇 점의 명문이 있다. 이 추에는 "나라의 미나"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그가 전국적인 무게 표준의 통일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시사된다. 또한 그가 아시리아 전통과 달리 두 번째 재위 연도가 아닌 네 번째 재위 연도에 에포님(연호 관직) 직을 수행한 사실은, 그가 후대 사르곤 왕조의 왕들에 의해 계승·유지된 일부 행정 개혁을 단행했음을 암시한다.

바빌로니아 통치와 관련하여, 샬마네세르는 남부의 칼데아 부족들로부터 일부 저항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5년경 그의 통치 기간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에서의 법률 문서 한 점이 발견되어 있으며, 보르시파(Borsippa) 지역의 복원 공사와 남부 반란 진압과 관련된 파편적인 비문도 존재한다.

사마리아 정복과 서방 원정

샬마네세르 5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스라엘 왕국(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함락이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Hoshea)는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샬마네세르는 기원전 725년 또는 724년경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약 3년간 지속되었으며, 기원전 722년 그의 재위 말기에 도시가 함락되었다.

바빌로니아 연대기와 성경(열왕기하 17:3~6, 18:9~11) 모두 사마리아의 정복을 샬마네세르 5세의 공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Sargon II)의 여러 비문에서는 자신이 사마리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에 대한 해석으로는 사르곤이 샬마네세르가 시작한 포위전을 마무리했을 가능성, 또는 시리아에서 발생한 별개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 등이 제기된다. 사마리아 함락 이후 약 3만 명의 이스라엘 주민이 아시리아 제국 전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는 "사라진 열 지파" 내러티브의 기초가 되었다.

샬마네세르는 이스라엘 외에도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 및 아나톨리아의 타발(Tabal) 왕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2세기경 그리스 역사가 메난데르(Menander)는 티레(Tyre)가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5년간 포위되었음을 기록했는데, 이는 샬마네세르의 재위 기간 중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사망 시점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타발 왕국의 왕 훌리(Hullî)가 샬마네세르에 의해 패배하고 아시리아로 추방된 사실은 사르곤의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폐위와 사망

기원전 722년, 샬마네세르 5세는 폐위되었고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폐위의 정확한 경위는 불명확하나 폭력적인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르곤의 비문 중 단 한 점만이 샬마네세르의 말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서 샬마네세르는 아슈르(Assur) 신전의 전통적인 권리와 특권을 박탈한 경건하지 못한 폭군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서술은 사르곤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샬마네세르가 그러한 조치를 취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샬마네세르가 폐위 과정에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망 경위는 확인할 수 없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그의 죽음을 "운명"이라는 표현으로만 기록하고 있으며, 자연사인지 폭력적인 죽음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샬마네세르가 아시리아를 탈출하여 주변국에 망명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의 후계자인 사르곤 2세는 합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곤이 샬마네세르와 전혀 혈연 관계가 없었다면, 샬마네세르 5세의 죽음은 약 1,000년 동안 아시리아를 통치해 온 아다시 왕조(Adaside dynasty)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다.

가족

샬마네세르 5세의 왕비는 바니투(Banitu)였다. 그녀의 무덤은 1988~1989년 님루드의 북서 궁전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바니투가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왕비였던 이아바(Iabâ)와 동일인물이라는 학설이 일부 아시리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이는 명확한 증거 없이 이름의 유사성에 기반한 추정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한 샬마네세르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로 아슈르-다인-아플루(Ashur-dain-aplu)가 있는데, 그가 사르곤의 폭력적인 왕위 찬탈 이후에도 살아남아 후대에 궁정 관료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적 의의

샬마네세르 5세는 짧은 재위 기간과 부족한 당대 사료로 인해 그 통치의 전모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마리아 정복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전환점과 깊이 연관된 인물이다. 그의 몰락은 아시리아 제국이 사르곤 2세와 그 후손들에 의한 사르곤 왕조로 전환되는 시점을 의미하며, 이는 후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절정기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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