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음운동은 1977년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정신수양·정신개혁 운동으로, 시대에 적응하는 새로운 가치윤리의 정립을 목표로 한 범국민적 정신운동이다. 이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농촌 현대화와 경제 발전을 추진한 물적·환경적 개선 운동이었다면, 새마음운동은 국민의 의식과 정신을 새롭게 개조함으로써 물질적 발전에 정신적 발전을 병행시키고자 한 운동으로 이해된다.
배경과 시작
새마음운동은 1977년 여성단체인 구국여성봉사단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다. 구국여성봉사단은 1976년 대한구국선교단의 부설단체로 발족한 단체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영애(令愛)였던 박근혜가 총재를 맡고 있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시작 시점은 1977년 3월로, 박근혜가 만 24세이던 때였다. 바쁘게 진행되던 경제 성장이 가져온 부(富)의 편재,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 확대,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로운 가치 윤리의 부재로 인한 정신적 황폐를 개선하기 위한 필요성이 이 운동의 출현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운동의 목표와 내용
새마음운동은 '밝은 마음, 맑은 마음, 고운 마음, 깨끗한 마음'이라는 네 가지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충(忠)·효(孝)·예(禮)를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 운동의 주창자였던 박근혜는 새마음운동을 "물질적인 발전과 정신 개발이 병행되도록 하려는 정신혁명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정신적 체질 개선, 도덕성 회복, 올바른 가치관 정립, 확고한 국가관 확립 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실천 활동으로는 자연보호운동, 의료봉사사업, 불우노인돕기, 불우청소년 선도사업, 불량식품 줄이기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봉사 활동이 포함되었다. 동시에 관(官)의 주도 아래 국민의 정신을 개조한다는 목표가 이 운동의 핵심적 성격이었다.
전개 과정
새마음운동은 1977년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새마음갖기 궐기대회'가 열렸고, 시·도별 중·고등학생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와 초등학생 웅변대회 등이 진행되었다. 1977년에는 새마음 전국대학생연합회가 결성되었고, 1978년 11월에는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발대식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또한 새마음직장봉사단이 결성되어 직장 단위로도 이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재외 동포 사회에서도 새마음갖기 전진대회가 열리는 등 국외에서도 전개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 운동을 지원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마음으로 자기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독려했으며, 1978년을 새마음운동 결의·실천의 해로 삼아 전국 확산을 꾀했다. 대한노인회와 성균관 유림회 등 다양한 사회 단체들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
조직의 변천과 종말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됨에 따라 1979년 5월 '새마음봉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그러나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전두환 정권이 집권하면서,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해체되었다.
평가와 논쟁
새마음운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경제 발전의 속도에 맞춰 국민의 의식을 끌어올리려는 긍정적인 시도였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유신체제 아래 정부가 단일한 국가관을 주입하려 한 정신개조운동이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을 이어가던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국가가 주도하여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키려 한 역사적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새마음운동과 구국여성봉사단을 둘러싸고는 당시 권력과의 연관성, 단체 운영 과정에서의 문제점 등과 관련한 논란이 여러 차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후 새마음운동의 조직적 계보는 1988년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와 1989년 출범한 근화봉사단 등을 통해 일부 이어졌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