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일통(三韓一統)은 한반도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를 신라가 통일하여 하나의 국가 체제를 이룩한 사건을 지칭한다. 주로 7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신라가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후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며 고유의 영토를 확보하여 통일신라 시대를 열었던 역사를 의미한다.
명칭 명칭은 '세 개의 한(韓)나라'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의미로, 고대 한국의 삼국을 지칭하는 '삼한'과 '하나로 통일함'을 의미하는 '일통'이 결합된 것이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로 볼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삼국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며 경쟁했던 시기이다. 각 나라는 영토 확장과 체제 강화를 목표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때로는 연합했다. 특히 6세기 이후 신라가 진흥왕의 활약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하며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연합하는 등 복잡한 국제 정세가 펼쳐졌다. 한편, 중국에서는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면서 한반도 삼국은 당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도모해야 했다.
통일 과정 신라의 삼한일통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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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 결성 및 백제 멸망 (648년 ~ 660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 시달리자,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였다. 김춘추(훗날 태종 무열왕)가 당나라에 건너가 나당연합을 성사시켰고, 660년 나당연합군(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 당 소정방)은 백제를 공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주류성 전투(663년)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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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668년): 백제 멸망 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과 연이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국력이 약화된 고구려는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당의 대규모 병력과 신라의 협공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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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및 통일 완성 (670년 ~ 676년):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한편,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간접 지배를 꾀했다. 이에 신라는 당에 맞서 옛 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당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매소성 전투(675년)와 기벌포 전투(676년)에서 당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대동강 이남으로 물러났고,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여 삼한일통을 완성하고 통일신라 시대를 열었다.
의의와 한계 삼한일통은 한반도에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중대한 사건이다. 비록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영토 일부가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며 완전한 '민족 통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으나, 문화적·정치적으로 통일된 신라의 역사는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는 약 200여 년간 안정된 시대를 구가하며 불교 문화와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당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옛 고구려의 넓은 영토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점 때문에 '자주적인 통일'인가, '불완전한 통일'인가에 대한 역사적 논쟁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