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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 대지진

산시 대지진(陝西大地震)은 1556년 1월 23일(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 2일) 이른 아침, 중국 명나라 시대의 섬서성(陝西省, 현 산시성) 화현(華縣, 현 화저우구)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다. 중국 역사 기록에서는 가정제(嘉靖帝)의 연호를 따 가정대지진(嘉靖大地震) 또는 화현대지진(華縣大地震)으로도 불린다.

발생 개요

지진의 진앙은 섬서성 위하(渭河) 계곡의 화현 일대로, 북위 34.5°, 동경 109.3° 부근으로 추정된다. 지진의 규모에 대해서는 학술적 추정치에 차이가 있다. 모멘트 규모(Mw) 기준 7.0~7.5로 보는 연구가 있는 반면, 일부 자료는 Mw 8.0 내외로 추정한다. 중국 지진 당국(CENC)은 규모를 Ms 8¼로 기록하고 있다. 최대 진도는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MMI) 기준 XI(Extreme)로 평가된다.

지질학적 배경

이 지진은 오르도스 강괴(Ordos Block)의 남쪽과 동쪽 경계를 이루는 웨이허-산시 열곡대(渭河-山西裂谷帶) 내의 웨이허 분지(渭河盆地)에서 발생하였다. 이 분지는 화산 단층(Huashan Fault)과 북친링 단층(North Qinling Fault) 등 주요 정단층(normal fault)에 의해 경계 지어지는 반지구대(half-graben) 구조로,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큰 지진을 일으킨 지역이다.

피해 규모

산시 대지진은 인류 역사상 기록된 지진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꼽힌다. 《명사(明史)》에는 "관리와 군민이 압사한 자가 83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수치에는 해석상 차이가 있다. 중국 지진국(CEA)의 분석에 따르면 지진으로 인한 직접 사망자는 약 1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약 70만 명 이상은 지진 이후 발생한 기근, 전염병, 인구 이동 등 간접적 원인으로 사망한 것으로 본다. 일부 연구자들은 전체 사망자 수를 45만 명 이내로 보다 낮게 추정하기도 한다.

대규모 피해의 원인

이 지진이 극단적으로 큰 인명 피해를 초래한 요인으로는 다음이 지목된다.

  1. 요동(窯洞) 주거 양식: 당시 황토고원(Loess Plateau) 지역 주민 대부분은 절벽을 파서 만든 동굴형 주거지인 요동에서 생활하였다. 부드러운 황토질로 이루어진 요동은 지진에 극도로 취약하여 대규모 붕괴와 매몰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2. 야간 발생: 지진이 사람들이 대부분 수면 중이던 이른 아침(자시, 子時)에 발생하여 신속한 대피가 어려웠다.

  3. 황토 산사태: 지진으로 인해 대규모 황토 산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2018년 《지진지질(地震地質)》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화산 산전단대(華山山前斷裂帶) 동서 양쪽 끝에서 각각 2,049개와 1,515개의 산사태가 확인되었고, 그 총 부피는 2008년 쓰촨 대지진(Mw 7.9)이 유발한 산사태 부피와 맞먹는 2.85~6.40 km³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2차 재해: 지진 직후 발생한 화재, 지반 균열, 지하수 이상 분출, 하천 범람 등이 피해를 확대시켰다. 또한 지진 발생 전 2년간 관중(關中) 지역에 가뭄이 지속되어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고, 겨울철 한파와 이후의 기근 및 전염병이 사망자 수를 크게 늘렸다.

영향 지역

지진의 피해는 섬서성, 산서성(山西省), 하남성(河南省)을 중심으로 감숙성, 하북성, 산동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 안휘성 등 10개 성의 97개 이상 현(縣)에 걸쳐 보고되었다. 진앙으로부터 반경 약 500km까지 광범위한 파괴가 발생하였으며, 북경, 성도, 상해에서도 진동이 감지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깊이 20m에 달하는 지표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기록

《조선왕조실록》 명종 11년 기록에도 이 지진이 언급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도미니코회 선교사 가스파르 다 크루스(Gaspar da Cruz)는 1556년 말 광저우를 방문하여 이 지진 소식을 접한 후 저서 《중국 여행기》(1569년)에서 이를 기록하였다.

지진으로 인해 시안(西安)의 소안탑(小雁塔)은 높이가 3층 감소하였으며, 현비림(碑林)의 개성석경(開成石經) 114좌 중 40좌가 파손되었다. 지진을 직접 경험한 명나라 학자 진가대(秦可大)는 《지진기(地震記)》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밖으로 뛰쳐나가지 말고 웅크리고 기다려야 한다. 둥지가 무너져도 알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여진

본진 이후 반년간 매달 3~5회씩 여진이 계속되었으며, 약한 규모의 여진은 5년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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