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러시아어: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은 러시아 사할린섬에 거주하는 한민족으로, 주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과 그 후손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킨다.
개요
사할린 한인은 사할린섬 남부(일본 통치 시기 가라후토(樺太) 청 소재지)에 거주하는 한국계 주민들이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이며, 언어와 이주 역사의 차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Корё сарам)과는 별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사할린주에는 약 3만 명 내외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약 50%가 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집중되어 있다.
역사
이주 배경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1897년 인구조사에는 사할린섬에 67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사할린 남부를 점령하고 가라후토 청을 설치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가라후토로 이동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그 규모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본격적인 한인의 사할린 이주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제국에 의한 강제 동원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군수산업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39년부터 모집 형태로, 1942년부터 관 알선 방식으로,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태로 조선인들을 사할린으로 끌고 갔다. 이 시기에 약 15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석탄 광산, 군수 공장, 제재소 등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중징용
일제는 사할린의 군수공장으로 해상 연료 운반이 어려워지자, 일본 본토의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약 1만 명을 다시 일본 본토로 재배치하는 이중징용(二重徵用)을 단행하였다. 1944년 8~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약 3,200명의 조선인은 생사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학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소련군이 사할린 남부를 침공하자 일본 경찰과 민간인에 의한 한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대표적으로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 학살 사건(1945년 8월 18일, 18명 사망)과 미즈호 마을(현 포자르스코예) 학살 사건(1945년 8월 20~23일, 27명 사망)이 알려져 있다. 2008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간부가 이 학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간하면서 추가적인 학살 사실이 알려졌고, 2012년에는 소련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면서 일본군에 의한 한인 대량 학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종전 후 방치와 무국적 상태
1945년 8월 일본 패망 당시 사할린에는 약 4만 3,000명의 조선인이 잔류하고 있었다. 연합군사령부는 소련과의 협정을 통해 사할린 거주 일본인(약 36만 8,000명)을 1946년 12월까지 일본으로 송환하였으나, 조선인은 '포츠담 선언'상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송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하였고, 대한민국은 광복 직후의 국력 부족으로 송환할 여력이 없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대한민국과 소련이 적대국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은 세 국가의 무관심 속에서 장기간 무국적자로 남았다.
대부분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었던 이들은 북한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귀환을 희망하였으나, 소련은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은 한국이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은 문제의 원인이 일본에 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였다.
귀환 운동
일본 도쿄에서 박노학(朴魯學)이 '화태귀환한국인회'를 설립하여 사할린 잔류 한인들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5년부터는 일본 변호사단이 '재사할린 한국인 귀환소송 변호인단'을 결성하고 일본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할린재판'이 1989년까지 진행되었다. 이 재판은 기소자 4명이 전부 사망하여 판결을 보지 못했으나, 사할린 한인의 상황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일본 정부는 사할린 한인 1세대의 귀환을 위해 경유권과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 개선으로 일부 한인이 고향 방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부터는 경기도 안산에 귀환 사할린 한인을 위한 정착촌 '고향마을'이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현황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다가 종전 당시 약 4만 3,000명이 잔류한 이후, 1989년에는 3만 5,191명(사할린 전체 인구의 약 5%)이 거주하였고, 2002년 비공식 조사에서는 3만 378명으로 집계되었다. 2005년 기준 한인 1세 인구는 3,547명으로 감소하였으며, 1992년부터 추진된 영구귀국사업으로 2007년까지 2,221명이 한국으로 영주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재외동포청과 대한적십자사는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2025년에도 영주귀국이 진행되고 있다. 사할린 내에는 고려인협회, 고려인문화센터, 이산가족회, 노인회 등의 조직이 있으며,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과 《새고려신문》이 운영 중이다.
언어와 정체성
사할린 한인은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에 기원을 둔 한국어를 사용하며,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주로 함경도 방언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한국어 교육 자료는 북한 표준을 따르는 경우가 많으나, 방송에서는 서울 표준어에 가까운 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는 주로 러시아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사할린 한인은 스스로를 고려인(중앙아시아 한인)과 구분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양 집단 간에는 일정한 긴장 관계도 존재한다.
종교
사할린 한인 중 상당수는 러시아 정교회와 개신교 신자이다. 소련 붕괴 이후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다수 설립되었으며,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을 통한 종교 콘텐츠 방송도 이루어지고 있다.
음식 문화
사할린 한인의 음식은 한국 요리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지화된 특성을 보인다. 대표적인 음식으로 퍈세(찐만두의 일종)가 있으며, 이는 사할린뿐만 아니라 러시아 본토의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도 널리 소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