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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찬 (관등)

사찬(沙飡)은 신라의 경위(京位) 17관등 가운데 제8등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이사금 9년(32년)에 17관등이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 반포를 전후하여 관등제가 완비된 것으로 본다. 사찬은 제7등인 일길찬(一吉飡)의 아래, 제9등인 급벌찬(級伐飡)의 위에 위치한다.

명칭 및 이표기

사찬은 살찬(薩飡), 사돌간(沙咄干), 사간(沙干), 사척간(沙尺干)이라고도 하였다. 6세기 초 금석문에서는 '사간지(沙干支)', 6세기 중엽 금석문에서는 '사척간(沙尺干)'과 '사간(沙干)'으로 나타나며, 하대 금석문에서도 '사간(沙干)'이 확인된다. 시간순으로 사간지→사간·사척간→사찬의 변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파악된다. '사(沙)'와 '살(薩)'은 동일한 발음의 이표기이다.

어원

'사찬'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사(沙)'를 고구려 관직명 '욕살(褥薩)'의 '살(薩)' 및 백제 관직명의 '-솔(率)'과 동계어로 보아 '우두머리'를 뜻한다는 견해(양주동 1956, 천소영 1990, 김상윤 2012)가 있다. 양주동은 이를 '관(官)'의 고어이자 '벼슬'의 어원으로 보았고, 천소영은 '수리'를 뜻한다고 보았다. 또한 '사(沙)'를 '새(新)'의 차자표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고대 한국어 재구음은 '*sara-kan(*사라간)'으로 추정된다. 한편 '사찬'과 그 아래의 '급찬'을 각각 신라 6부 중 사량부(沙梁部) 및 급량부(及梁部)와 관련된 이름으로 보는 견해(今西龍)도 제기되었으며, 이에 착안하여 '사'는 '새[新]', '급'은 '근본'의 뜻으로 파악하면서 6부의 '간지(干支)'를 위계화하는 과정에서 분화하여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전덕재)도 있다.

신분 및 복색

사찬은 진골(眞骨)뿐 아니라 육두품(六頭品)도 받을 수 있었다. 비색(緋色, 불빛과 같은 짙은 분홍색)의 공복(公服)으로 신분을 표시하였다.

중위제(重位制)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사찬의 중위제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856년(문성왕 18)에 조성된 규흥사종명(窺興寺鐘銘)에 '삼중사간(三重沙干)'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로 보아 사찬 관등에도 최소한 3중사찬까지의 중위제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이는 나말여초 시기 지방 호족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서의식, 2010). 아찬(4중)·대나마(9중)·나마(7중)의 중위제가 골품제의 신분 상한선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찬의 중위제는 지방민이나 토착 세력에게 특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관직 진출

사찬은 중앙 관청의 차관급인 대감(大監)을 맡을 수 있었다. 병부(兵部)·예작부(例作部)의 대감은 사찬에서 급찬까지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었고, 창부(倉部)·선부(船部)의 대감은 사찬에서 나마까지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었다. 지방 행정에서는 5소경(五小京)의 장관인 사신(仕臣)에 사찬에서 급찬까지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될 수 있었다.

외위와의 관계

신라의 외위(外位) 11관등 가운데 제2등인 술간(述干)은 경위의 사찬에 대응하는 관등이었다. 외위는 지방민에게 주어진 관등 체계였으나, 674년(문무왕 14)에 지방민에게도 경위가 주어지면서 외위는 소멸되었다.

역사적 인물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사찬 관등 소지자로는 강수(强首), 열기(裂起), 구근(仇近), 구진천(仇珍川), 일원(日原), 당천(當千), 시득(施得), 김둔산(金遁山), 김삼광(金三光) 등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王隆)도 송악군의 성주로서 사찬 관등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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