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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1858년 12월 2일~1936년 2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이며, 작위는 백작(자작에서 승작)에 이른다. 일본 제30대 내각총리대신, 제3대 및 제5대 조선총독, 해군대신, 내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58년 무츠국 이사와군(현 이와테현 오슈시)에서 센다이 번의 번사 사이토 고헤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3년 해군병학료(후일 해군병학교)에 입학하여 1879년 졸업하였고,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884년부터 1888년까지 미국에 유학하며 주미일본공사관 주재무관으로 근무하였고, 이 시기 자유주의적 성향과 영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해군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892년 해군대신 니레 가게노리의 딸과 결혼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메이지 천황의 시종무관으로 대본영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순양함 아키즈시마·이쓰쿠시마의 함장을 거쳤다. 1898년 해군차관에 취임하였고, 1906년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해군대신에 임명되어 1914년까지 5개 내각에 걸쳐 해군대신을 지냈다. 러일전쟁의 전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2년 해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914년 지멘스 사건(일본 해군과 독일 지멘스사의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해군대신에서 물러나 예편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제3대 조선총독에 취임하였다. 당시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는 육군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해군 출신인 사이토를 발탁하였다. 사이토는 기존의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을 시도하였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으며, 지방 자문기관을 설치하고 조선인을 하급 관리로 등용하는 등 회유 정책을 폈다. 한편으로 경찰과 군대를 증강하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독립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으며,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일본의 식량 문제 해결을 명목으로 조선에서의 경제 수탈을 강화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군축 회의 전권대사로 참석한 후 조선총독에서 물러났다.

1929년 후임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뇌물 의혹으로 사임하자 제5대 조선총독으로 재취임하여 1931년까지 재임하였다. 이 시기 조선 지방의회 구상과 조선박람회 개최 등을 추진하였으나, 일본 의회와의 갈등 끝에 경질되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된 후,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제3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초당적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만주국을 정식 승인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등 군부의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1934년 제국인조견사주식회사 관련 의혹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1935년 내대신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2·26 사건 당시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도쿄 자택에서 암살당하였다. 향년 77세였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사이토 마코토를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강화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가 시행한 문화 통치는 기만적 성격의 회유 정책이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합리주의적 군인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하나, 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한편 동명의 일본 그래픽 디자이너 사이토 마코토(1952년 12월 21일~ )도 존재한다. 후쿠오카 출생으로, 일본 디자인 센터를 거쳐 1980년 사이토 마코토 디자인을 설립하였다. 텍스트 없는 고밀도 이미지 포스터로 대표되며,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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