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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진왜변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은 1544년(조선 중종 39) 4월, 경상도 사량진(오늘날의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진촌마을 일대)에서 발생한 왜인(倭人)들의 약탈 사건이다. '사량왜변(蛇梁倭變)'이라고도 부른다.

역사적 배경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 정부는 왜인들의 불법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였다. 이 약조로 세견선(歲遣船)을 210여 척에서 60여 척으로 줄이는 등 왜인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교역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완전히 그치지 않았다.

사건의 전개

1544년 4월,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 약 200여 명의 왜적이 사량진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사량진 만호(萬戶) 유택(柳澤)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맞서 싸웠으나, 수군 1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왜적은 인마를 약탈한 뒤 물러갔다.

영향과 결과

이 사건의 규모나 성격은 1510년의 삼포왜란과는 달랐으나,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일본과의 통교를 완전히 끊자는 절왜론(絶倭論)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외교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경우 왜구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을 우려하여, 국왕사(國王使) 및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일본의 오우치(大內) · 쇼오니(少貳) 세력에 대해서는 통교를 계속 허용하고, 대마도(對馬島)에 대해서만 통교를 금지하였다. 대마도주가 왜구의 동향을 알면서도 방임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이 왜변을 계기로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가덕도(加德島)에 진(鎭)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본 측의 간절한 요청과 중종의 거상(居喪) 기간 종료 등을 이유로,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가 체결되어 통교가 재개되었다. 정미약조의主要内容은 세견선을 25척으로 제한하고, 풍랑을 구실로 가덕도 서쪽에 내항하는 일본인은 왜적으로 간주하며, 모든 약속은 조선 진장(鎭將)의 명에 따르도록 규정하여 출입 규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자체의 내전 혼란으로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이후 1555년(명종 10년)에는 전라도 지역에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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