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포리 반란(핀란드어: Viaporin kapina, 스웨덴어: Sveaborgsrevolten)은 1906년 7월 30일 저녁부터 8월 2일까지, 당시 러시아 제국 하의 핀란드 대공국 헬싱키 해안에 위치한 비아포리 요새(스베아보리 요새, 현재의 수오멘린나 요새) 주둔군이 일으킨 무장 반란이다. 이 반란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후폭풍의 일부로, 1906년 여름 대부분의 러시아 제국 지역에서 혁명운동이 사실상 진압된 시기에 발생했다.
배경
비아포리 요새는 18세기에 헬싱키의 해안 방어를 위해 건설된 요새였다. 1906년 당시 이 요새에는 포병 약 1,800명, 보병 약 1,500명, 공병 약 250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총 병력 약 3,500명은 헬싱키 및 그 주변에 주둔한 러시아 제국군 전체 병력의 약 절반에 해당했다. 핀란드계 친위대가 1905년에 해산되어 핀란드 대공국에는 핀란드계 군부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주둔군 병사는 모두 러시아 출신이었다.
반란의 주도 세력
반란을 주도한 것은 초급 장교 세 명, 즉 러시아 육군의 세르게이 치온 대위, 아르카디 에멜랴노프 중위, 예브게니 코칸스키 중위였다. 비밀리에 볼셰비키에 동조하고 있던 치온 대위는 핀란드 국민위병 지도자 요한 코크와 접촉했다. 국민위병은 좌익 계열의 반차르주의 운동 집단으로, 당시 구성원은 6천 명을 초과했으나 무장 수준이 열악하고 훈련도 충분하지 않았다.
반란의 전개
반란은 당초 계획보다 이른 7월 30일 저녁에 발생했다. 열악한 식품 상태와 특별 급여의 취소가 러시아 공업지대에서 징집된 공병 및 포병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특히 불안정했던 공병 중대는 일찍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인근 초소로 이동되었는데, 이에 대응하여 포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상급 장교들을 쫓아내거나 가두기 시작했다. 7월 31일까지 약 2,000명이 반란에 참여했다. 반면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구성된 보병 부대는 상대적으로 체제순응적이어서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장교의 지휘를 계속 따랐다.
반란 지도부는 반란이 헬싱키와 크론시타트 일대 해군 기지에 주둔한 발트 함대 수병 전반의 봉기로 확산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전년도의 포템킨 전함 반란 등 해군 내 불안은 대부분 진압된 상태였고, 비아포리 인근의 군함 수병들은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또한 핀란드에 주둔한 코사크 기병대와 보병 부대도 명령을 계속 준수했다. 반란군은 인근 카타야노카를 점령했으나 봉기는 빠르게 탄력을 잃었다.
진압과 결과
8월 1일, 충성파 군대가 함포 사격을 가한 뒤 반란에 참여한 포병 및 공병의 대다수가 항복했다. 반란은 약 60시간 동안만 지속되었다. 반란 결과 반란군 중 43명이 처형되었고, 127명이 중노동형, 735명이 투옥되었다. 반란 지도부 중 에멜랴노프와 코칸스키는 처형되었으며, 치온의 처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핀란드 측 관련 사건
한편 핀란드 국민위병 대원 수백 명이 반란군에 합류했고, 요한 코크는 총파업을 요청했다. 그러나 헬싱키 하카니에미에서 러시아 수병들과 핀란드 반공주의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으며,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난 후 제국군이 승리했다. 코크는 스웨덴으로 도피했고 이후 잉글랜드에 정착했다. 이 하카니에미 사건의 여파로 핀란드 원로원은 국민위병과 시민위병(백위대)을 모두 금지시켰다.
실패 요인
이 반란은 참여 인원수에 비해 차르 정부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핀란드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 주둔군 내부의 불만에 무관심했고, 1906년 8월 시점에는 러시아 육군과 해군 내부의 규율과 사기가 상당 부분 회복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핀란드인이 러시아 점령군 내부의 문제에 동조하지 않은 점과 차르 군대의 통제력 회복이 반란의 실패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 사건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후기 단계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러시아 제국 내 혁명 세력의 한계와 차르 체제의 진압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