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수 전투는 고구려와 중국 삼국시대 위(魏) 사이에서 벌어진 고구려-위 전쟁의 일부로, 고구려 제11대 왕인 동천왕(東川王, 재위 209~248) 시기에 비류수(沸流水) 일대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전투를 가리킨다. 이는 한국 고대사와 중국 정사에 모두 기록이 남아 있는 실재 역사 사건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위키백과 등 공신력 있는 사료에서 확인된다.
배경
고구려는 동천왕 치세 초기 위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42년 고구려가 위나라의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후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오환족·선비족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위나라는 촉(蜀)나라와의 전쟁으로 본국의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관구검이 요동 지역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단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 경과
기록에 따르면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약 2만 명을 이끌고 비류수 상류로 진군하여 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삼국사기』 및 한국측 사료 일부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비류수에서 위군을 크게 격파하고 참수 3천여 급을 올린 이후 양맥 곡창(梁貊谷)에서도 위군을 다시 격퇴한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동천왕이 자만하여 추격전을 벌이다가 관구검이 구축한 방진(方陣)에 패배하여 고구려군 약 1만 8천 명이 전사하고, 동천왕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후퇴한 것으로 전한다.
한편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 관구검전과 『양서(梁書)』 동이열전에서는 비류수에서의 교전에서 고구려측이 패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 전투의 전개 양상에 대한 한국측 사료와 중국측 사료 간에 해석상 차이가 존재한다. 전투의 시점에 관해서도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를 근거로 244년이라는 설과, 위키백과 등 일부 자료에서 245년으로 보는 설이 있어 정확한 연대에 대한 학계의 일치된 결론은 아직 확정적이지 않다.
결과 및 영향
비류수 일대에서의 교전 이후 관구검의 위군은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고 성을 파괴하였으며, 이어 245년에는 동천왕을 북옥저까지 추격하였다. 동천왕은 약 2년에 걸쳐 추격을 피해 도주하였고, 이후 충신 밀우(密友)·유유(劉屋) 등의 활약으로 위군을 격퇴하여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수도가 파괴되고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으며, 동천왕은 수도를 일시적으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다.
전투의 명칭인 '비류수'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건국하고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중심에 위치했던 강으로,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에 걸쳐 흐르는 훈장(渾江)에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그 위치가 상세하지 않은 곳'으로 분류되었을 만큼 논란이 있으며, 훈장강의 지류인 푸얼강(富爾江)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료적 의의
비류수 전투는 고구려 초기의 대중국 전쟁을 보여주는 핵심 사건으로, 『삼국사기』, 『삼국지』, 『양서』 등 동아시아 여러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다. 전투의 규모, 시기, 전개 과정에 대한 세부 내용은 사료별로 차이가 있어, 이에 대한 정밀한 검증이 학계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