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11년 1월 22일 ~ 1990년 7월 29일)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으로,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오스트리아 연방수상(총리)을 역임하였고,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소속이었으며,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출신 총리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령 총리(72세 퇴임)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와 배경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빈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봉제 공장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16세 때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 청년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당시 사회주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2년간 수감되었고,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이후에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스웨덴으로 망명하였다. 스웨덴 망명 기간 동안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일하며 생활하였고, 이후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와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
정치 경력
1946년 오스트리아에 귀국한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장관급 비서관,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국가 조약 협상에 참여하였다. 1959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1966년까지 재임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 가입 협상과 남티롤 문제 해결에 기여하였다.
1967년 사회민주당 당수에 선출되었고,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소수 내각을 구성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71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절대 다수를 확보하면서 1983년까지 장기 집권하였다. 이 시기 그는 '카이저 브루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주요 정책과 업적
국내 정책으로는 복지 국가 확대, 노동 조건 개선, 사회적 파트너십(노동과 자본 간의 타협과 협력) 증진을 추진하였다. 빈에 지하철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엔 빈 사무국(UNO City)을 유치하여 빈을 국제 외교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외교 정책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정책을 바탕으로 동서 냉전 시기 초강대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197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를 만난 최초의 서방 정부 수반이었으며, 1975년 동독과 영사 조약을 체결한 첫 서방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회장으로서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등과도 교류하였다.
논란과 말년
크라이스키는 나치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1978년 츠벤텐도르프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반대 결과가 나왔으나 사임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건강이 악화되어 투석과 신장 이식을 받았으며, 1983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절대 다수를 잃자 연정을 구성하지 않고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1987년까지 사회민주당 명예 의장을 지냈고, 1990년 빈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가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주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오스트리아를 중립 약소국에서 국제적 위상을 가진 국가로 탈바꿈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재임 기간은 '크라이스키 시대'(Kreisky Era)로 불리며, 오스트리아 현대사의 중요한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