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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기준 인구는 17,145명으로, 국내 성씨 본관 중 280위에 해당한다.

시조 및 연원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 615~682)으로 전해진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등 2,0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문중의 전승에 따르면 당 고종이 부여융에게 서씨(徐氏) 성을 하사하고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당나라 사성설(賜姓說)'은 역사학계에서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과 한국의 정사(正史) 기록에서 부여융은 사망할 때까지 '부여융'이라는 이름으로만 나타나며, 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에도 서씨로 개성(改姓)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또한 부여융의 후손들(부여문선, 부여덕장, 부여태비 등)도 모두 부여씨 성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어, 당나라가 부여씨를 서씨로 바꾸어 주었다는 주장은 문헌적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시조 및 계보

부여융 이후의 세계(世系)는 전해지지 않으며, 고려 시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중시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다만 시조 설정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증보문헌비고』(1790년경)는 부여 서씨의 시조로 승사랑(承仕郞)을 지낸 서수손(徐秀孫, 15세기 후반 추정)을 기록하였고, 『만가보』는 서청습(徐淸習)을 시조로, 서수손을 그 후손으로 보았다. 1925년 편찬된 『부여 서씨 세보(扶餘徐氏世譜)』는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를 열거하고 그 뒤를 비운 후 서존을 중시조로 삼아 계보를 정리하였다. 이처럼 시조와 중시조에 대한 인식은 문헌마다 차이가 있으며, 족보의 계보는 조선 중후기 이후 재구성된 측면이 있다.

역사적 배경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여 서씨가 부여 지역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시대 효자 서공(徐恭)이 등재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부여 서씨가 12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고려 관료계의 말단에서 시작하여 혼맥을 맺으며 성장한 가문으로, 14세기 중반부터 각 파(派)가 형성되어 이름을 알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요 인물

  • 서익(徐益, 1542~1587):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의주목사 등을 역임. 이이·정철과 교유하였으며, 시조 2수를 남김.
  • 서필원(徐必遠, 1614~1671): 조선 현종 때 형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냄. 호남에 대동법을 확대 정착시켰으며, 직언을 잘하여 '오직(五直)'이라 불림. 시호는 정의(貞毅). 부여 서씨 정의공파(貞毅公派)의 파조.
  • 서성(徐晟, 1942~ ): 대한민국 대법관 역임.
  • 서승진(徐承鎭, 1953~ ): 제24대 산림청장.
  • 서창빈(徐彰彬, 1999~ ): 아이돌 그룹 Stray Kids의 멤버.

집성촌

주요 집성촌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평안남도 덕천군 등이 있다. 부여군 남면 삼용리에도 소규모 집성촌이 남아 있다.

인구 분포

1985년 13,041명, 2000년 14,312명, 2015년 17,145명으로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학계의 평가

부여 서씨의 백제 왕실 후계설(당나라 사성설)은 조선 시대 『증보문헌비고』에서 이미 "문헌에 증거가 없다"고 지적된 바 있으며,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부여융의 묘지명 발굴 등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백제 멸망 후 한반도에 남은 백제 왕족들이 신라의 지배 아래에서 부여(扶餘)씨에서 서(徐)씨로 성을 변형하였을 가능성에 대한 추정이 제기되나,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문헌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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