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釜山鎭戰鬪)는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4일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의 부산진성(釜山鎭城)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로 기록된다.
배경
1592년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 1군 약 1만 8,700명이 40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당시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였던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 일대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일본 함대의 침입을 목격하고 급히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정발은 전선 3척을 자침(自沈)시키고 성내 백성들을 소집하여 농성전을 준비하였다.
전투 경과
일본군은 음력 4월 14일 새벽부터 우암(牛巖) 방면에서 상륙하여 성을 세 방면에서 포위·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성 서문 밖의 높은 지대에 조총수(鳥銃手)를 배치하여 성안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조선군은 주로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조총에 비해 사거리와 화력에서 크게 열세였다. 정발은 동문루(東門樓) 앞에서 군민을 소집하여 지휘하였으나, 정발 본인이 조총에 맞아 전사하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히 무너졌고 성은 함락되었다. 첨사 이하 수많은 군민이 전사하였다.
전투 이후
부산진성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성 안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기록된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약 8,500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전한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전함 약 100척을 스스로 침몰시키고 무기와 군량을 파괴한 뒤 한성으로 도주하였다. 일본군은 다음 날 부산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동래성(東萊城)으로 진격하여 동래성 전투를 벌였다.
의의 및 평가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로, 조선의 첫 방어선이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단시간에 붕괴되었음을 보여준다. 부산항은 이후 일본군의 주요 상륙 지점이자 보급 기지로 활용되었다. 한편, 정발의 분전과 순국은 이후 충렬사(忠烈祠)를 통해 추모되었으며, 조선 영조 대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391호로 지정되어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산에는 정발의 동상이 일본 영사관 옆에 세워져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이 전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