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普天堡襲擊)은 1937년 6월 4일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현 량강도 보천군)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 소속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 경찰 주재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무장 독립군의 대규모 습격 작전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존재를 국내외에 알리고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배경 1930년대 중반, 만주를 기반으로 한 조선인들의 항일 무장 투쟁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항일 유격대 지휘관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위축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만주 일대에만 국한되었던 항일 투쟁의 무대를 국내로 확장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김일성 부대가 속해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은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활동하며 국내 진공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보천보는 압록강과 가깝고 치안이 비교적 허술한 지역으로, 침투 및 작전 수행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
경과 1937년 6월 4일 밤, 김일성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약 150여 명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에 진입했다. 이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동시에 보천보 내 주요 일본인 기관을 습격했다. 주요 목표는 일본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소방서 등이었다.
- 경찰 주재소 습격: 교전 끝에 주재소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 면사무소 및 우편소 방화: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을 상징하는 건물들을 불태웠다.
- 선전 활동: 주민들에게 항일 선전 전단을 배포하고, 김일성이 직접 연설하여 조선 민족의 독립을 촉구하며 항일 투쟁 참여를 독려했다. 연설 내용은 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조선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철수: 습격 후 약 4시간 만에 일본군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부대는 안전하게 압록강을 다시 건너 만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일부 교전이 있었으나, 피해를 최소화하며 성공적으로 이탈했다.
의의 및 영향 보천보 습격은 비록 소규모의 습격전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 일제강점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무장 독립군의 공격으로, 조선인들에게 항일 무장 투쟁이 실존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 민족의식 고취: 당시 보도 통제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습격 소식이 국내외에 퍼지면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와 투쟁 정신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 김일성 명성 강화: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그의 항일 투쟁 경력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 일본의 탄압 강화: 일본 제국주의는 보천보 습격에 충격을 받고 국경 지역의 경비를 강화하고 만주 지역 항일 유격대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화했다.
역사적 평가 및 논란 보천보 습격은 북한의 공식 역사관에서 김일성의 혁명 위업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크게 부각된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 동지가 직접 지휘하여 조국에 진출한 첫 대사변'으로 평가하며, 김일성의 주체적 혁명 사상의 발현과 위대한 항일 업적을 강조한다. 그러나 남한 및 서구 학계에서는 북한의 이러한 평가가 습격의 실제 규모와 김일성의 역할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 습격의 규모는 당시 만주 지역에서 빈번했던 다른 항일 유격대의 작전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대규모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김일성 개인의 단독적인 성과라기보다는 당시 항일 무장 투쟁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의 성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보 습격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항일 투쟁의 역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