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국(報德國)은 신라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 지역인 금마저(金馬渚,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 정착시켜 세운 자치국 또는 보호국이다. 국호는 공식적으로 고려(高麗)를 사용하였으며, 외교 관계에서 일본 측 기록(『일본서기』)에도 '고려(高麗)'로 등장한다.
건국 배경 및 과정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왕족 안승은 사야도(史冶島)에 머물고 있었다. 670년 검모잠(劍牟岑)이 안승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켰다. 부흥군은 신라에 복속을 약속하며 도움을 청하였고,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후 당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내분이 발생하여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674년(문무왕 14년) 9월,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하고 금마저를 하사함으로써 보덕국이 성립되었다.
정치 체제 및 대외 관계
보덕국은 형식적으로 신라의 번속국(藩屬國)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고구려의 5부(五部)와 관등 체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보덕국 사신들의 관직명(위두대형, 전부대형, 태대형, 상부, 하부, 조유 등)은 고구려에서 사용되던 것과 동일하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사신을 교류하였으며, 일본은 보덕국을 고구려의 후신(後身)으로 인식하여 견고려사(遣高麗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679년에는 신라군의 휘하에서 나당 전쟁에 참전하여 당군을 격퇴하였다.
멸망
683년(신문왕 3년), 신라는 안승을 경주(서라벌)로 이주시키고 소판(蘇判)의 관직과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보덕국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안승의 친족이자 장수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에 의해 최종 진압되었다. 보덕국의 존속 기간은 약 10년(674년~683/684년)이다.
의의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고 옛 백제 지역의 유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신문왕 대에 대내외 정세가 변화하면서 그 필요성이 사라지자 해체되었다. 보덕국이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과 귀족들은 남원경(南原京,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으로 이주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현악기인 거문고가 한반도 남부에 전파되었다.
역대 군주
| 대수 | 시호 | 성명 | 재위 기간 |
|---|---|---|---|
| 제1대 | 보덕왕(報德王) | 고안승(高安勝) | 674년~683년 |
※ 안승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라는 설과 연정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 문헌 : 『삼국사기』, 『일본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