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7세 (라틴어: Bonifacius VII)는 974년과 984년에서 985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 교황으로 재위했던 인물이다. 본명은 프란코 페루치(Franco Ferrucci)이다. 10세기 교황권의 혼란기인 이른바 '암흑 시대'(Saeculum obscurum)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폭력과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생애를 보냈다.
생애 초기 및 첫 번째 재위 (974년)
프란코 페루치는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인 크레센티 가문과 연관된 인물로, 원래는 추기경 부제였다. 974년, 그는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6세를 로마의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에 투옥하고 살해한 후 스스로 교황좌에 올랐다. 그는 교황직을 찬탈한 후 보니파시오 7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의 반발을 샀다. 오토 2세는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대리인인 시코 백작을 파견했고, 시코 백작이 로마에 개입하자 보니파시오는 약탈한 교황청의 많은 보물과 재물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피하였다. 이로써 그의 첫 번째 교황 재위는 몇 개월 만에 끝났다.
두 번째 재위 (984년 ~ 985년)
983년 오토 2세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오토 3세가 즉위하면서 제국의 로마 통제가 약화되자, 보니파시오는 이 기회를 틈타 984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정식 교황이었던 요한 14세를 산탄젤로 성에 투옥하고, 결국 굶겨 죽이거나 독살하는 방식으로 살해한 후 다시 교황좌를 찬탈하였다.
그의 두 번째 재위 기간은 약 11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공포 정치로 점철되었다. 로마는 그의 통치 아래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에 시달렸다.
죽음
보니파시오 7세는 985년 7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자연사인지 아니면 암살당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로마 시민들에 의해 끌려다니며 모욕당했으며, 발다키노 광장(Piazza di Baldacchino)에 내버려졌다가 다음 날 매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죽음은 로마 시민들의 오랜 불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평가
보니파시오 7세는 교황권의 '암흑 시대' 동안 가장 악명 높은 대립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교황좌를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살인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로 기억되며, 10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존재는 당시 교황청이 얼마나 세속적인 권력 투쟁의 장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같이 보기
- 대립 교황
- 베네딕토 6세
- 요한 14세
- 오토 2세
참고 문헌
- 존 노먼 켈리, 마이클 월시 (2015). 《옥스퍼드 교황사전》. 을유문화사.
- "Boniface VI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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