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邊鮮煥, 1927년 9월 23일~1995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목사, 철학자이다. 호는 일아(一雅)이며, 한자 표기는 邊鮮煥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부 자료에서는 卞善煥으로도 표기된다. 대한민국 신학계에서 종교다원주의와 토착화 신학을 주창한 인물로 평가된다.
생애
변선환은 1927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진남포상공학교 기계과 재학 시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석구 목사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학교 졸업 후 진남포 제련소 설계사로 근무하다가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여 1948년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국전쟁 발발과 1·4후퇴를 계기로 단신으로 월남하였고, 부산에서 감리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편입하여 1953년 졸업하였다. 이후 육군 군종장교로 약 7년간 복무했으며,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0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목을 지냈으며, 1965년 미국 드류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유학한 후 1967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강의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감리교신학대학 원장을 거쳐 1988년 학장이 되었고, 1991년 한국기독교공동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신학 사상과 논란
변선환은 초기에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신학과 카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철학을 연구하다가, 유학 이후 아시아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토착화 신학과 종교 간 대화 신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개종을 전제로 하지 않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취했으며,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주력하였다.
1990년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감리교회 내 보수적 목회자들의 반발을 샀고, 교리수호대책위원회의 고발로 이어졌다. 1991년 10월 감리교 특별총회에서 "감리교 교리에 위배된다"는 평결을 받았으며, 1992년 5월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서 최고형인 '출교'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는 최후진술에서 개종을 전제로 한 전도 활동은 다른 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종교적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계의 진보와 보수 간 신학 갈등을 대표하는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2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집필과 강연에 전념하다가, 1995년 8월 7일 또는 8일 원고 집필 중 뇌일혈로 쓰러져 별세하였다. 사후 그의 부인과 제자들에 의해 논문과 저술이 묶인 『변선환 전집』(전 7권)과 유고 설교집 『인생은 살만한가』가 간행되었다.
평가 및 유산
변선환은 사후 '변선환아카이브'를 통해 후학들에 의해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2005년 사망 1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강연회와 추모논문집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가 출판되었다. 그의 신학은 한국 개신교계에서 종교다원주의와 토착화 신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적 관점의 신학 정립과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에 대해 후대 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