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링하우젠 전투(Battle of Vellinghausen, 또는 빌링하우젠 전투, 키르히덴케른 전투)는 1761년 7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틀에 걸쳐 벌어진 7년 전쟁(1756~1763)의 일부이다. 전투는 현재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벨링하우젠(Vellinghausen, 오늘날의 함 시 인근) 일대에서 발생하였다.
배경
7년 전쟁 중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독일 지역으로 진출하여 연합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브로이 공작(Victor François, 2nd Duc de Broglie) 원수와 수비즈 공(Charles de Rohan, Prince de Soubise)이 각각 지휘하는 두 개의 군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1761년 7월 합류하여 약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리프슈타트(Lippstadt)에 주둔 중이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Prince Ferdinand of Brunswick)가 지휘하는 프로이센-하노버-영국 연합군(약 6만~8만 명)을 몰아내려 하였다.
전투 경과
7월 15일, 프랑스군은 진군을 시작하였다. 브로이의 부대는 북쪽에서 연합군의 좌익을 공격하였고, 수비즈 부대는 우익을 향해 진격하였다. 연합군은 리페 강(Lippe River) 북안과 아흐세 강(Ahse River)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언덕 지형을 활용하여 진지를 갖추었다. 그랜비 후작(John Manners, Marquess of Granby)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연합군 중앙과 우측을 담당하며 프랑스군을 견제하였다.
7월 16일, 브로이는 연합군 좌익에 대해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수비즈는 우익에서 소극적인 공세만을 취하였는데, 두 프랑스 사령관이 동등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수비즈가 브로이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지휘 체계의 불협화음은 프랑스군의 전술적 실패 요인으로 지목된다. 연합군 측에서는 볼프(Wolff) 휘하의 지원 부대가 리페 강가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였고, 이에 브로이의 공세는 붕괴되었다. 정오 무렵 프랑스군은 퇴각을 완료하였고 전투는 종료되었다.
결과 및 영향
-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독일 서부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 프랑스군 피해: 약 5,000명(브로이 부대 4,700명, 수비즈 부대 300명)
- 연합군 피해: 약 1,400명
- 이 전투의 소식은 영국에 전해져 큰 환영을 받았으며, 당시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가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후 프랑스군은 여전히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두 군대로 분할되어 작전을 계속하였고, 결국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점령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기념
1912년, 전투 현장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전투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