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와 헤어는 1827년부터 1828년까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최소 16명을 살해하여 그 시신을 해부학 연구용으로 판매한 아일랜드 출신 연쇄 살인범 윌리엄 버크(William Burke)와 윌리엄 헤어(William Hare)를 지칭한다. 이들의 범죄는 당시 의학계의 시신 수급 문제와 맞물려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으며, 영국의 해부학 관련 법률 개정(1832년 해부학 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배경
19세기 초 에든버러는 해부학 연구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특히 저명한 해부학자 로버트 녹스(Robert Knox) 박사는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합법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신은 주로 사형된 범죄자의 시신으로 한정되어 있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신 도굴꾼(resurrectionists)'들이 묘지에서 시신을 훔쳐 의료기관에 판매하는 일이 성행했는데, 버크와 헤어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직접 사람을 살해하여 신선한 시신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신이 손상되면 녹스 박사가 구매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희생자들을 목 졸라 죽이거나 질식사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살해 방식은 나중에 '버킹(Burking)'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범죄의 시작과 전개
버크와 헤어의 범죄는 1827년 말, 헤어가 운영하던 하숙집에 머물던 한 노인이 자연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헤어는 버크와 함께 이 시신을 녹스 박사에게 팔아 7파운드 10실링을 벌었다. 이들은 시신 판매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술에 취하거나 병약한 하숙객이나 거리의 사람들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시신을 녹스 박사에게 팔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은 주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의 실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체포 및 재판
1828년 10월, 마지막 희생자인 마가렛 도처티(Margaret Docherty)의 시신이 버크의 하숙집에서 발견되면서 이들의 범죄가 드러났다. 당시 하숙객이었던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와 그의 아내가 우연히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버크와 헤어를 체포했으며, 조사 과정에서 헤어가 수사 협조 대가로 면책(King's Evidence)을 약속받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후 버크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1828년 12월 24일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은 큰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사람이 녹스 박사도 공범으로 처벌받기를 원했으나, 녹스 박사는 살인에 직접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기에 기소되지 않았다.
처형 및 유산
윌리엄 버크는 1829년 1월 28일 에든버러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신은 해부학 강의를 위해 에든버러 대학교에 기증되었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해부학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해부되었다. 그의 유해 중 일부는 현재 에든버러 대학교 아나토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피부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책자도 남아있다.
헤어는 면책 약속에 따라 석방되었으나, 대중의 비난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녹스 박사는 사건 이후에도 의사 생활을 계속했지만, 그의 명성은 회복되지 못했으며 결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말년을 보냈다.
버크와 헤어 사건은 영국의 해부학 연구와 시신 수급에 대한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며 1832년 해부학 법(Anatomy Act 1832)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해부학 연구를 위한 시신 확보의 합법적인 절차를 마련하여 시신 매매 및 도굴을 근절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이름은 이후 '시신을 팔기 위한 살인' 또는 '부당하게 살해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