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용(白禹鏞, 1883년~1930년)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군인 겸 음악가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서울 출생이다. 생년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83년생, 관원이력서는 1884년생, 위키백과는 1880년생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1898년 한성덕어학교(漢城德語學校)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1901년 1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9월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 8월 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에 임관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한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의 통역을 맡으면서 그에게 서양 음악을 배웠다. 에케르트가 독일어로 설명하면 백우용이 조선어로 통역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을 익혀 군악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04년 5월 군악중대 3등 군악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2등 군악장, 1907년 3월 1등 군악장(오늘날의 대위에 해당)에 올랐다. 1906년 군악대 창설의 공로로 훈6등 팔괘장을 받았다. 1907년 초대 군악대장 김학수 사후 제2대 군악대장으로 취임하였다.
한일병탄 이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군악대는 궁내부 장예원(掌禮院) 소속의 양악대로 전환되었고, 백우용은 양악사장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15년 이왕직(李王職) 양악대가 해산된 이후, 1919년 11월 사재를 털어 민영 오케스트라인 경성악대(京城樂隊)를 창단하여 1930년 사망할 때까지 운영하였다.
1928년 4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촉탁으로 위촉되어 한국 전통 아악(雅樂)을 오선보(五線譜)로 채보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가 채보한 「여민락」 등의 악보는 현재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으나, 아악 전곡의 오선보 채보를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1910년 8월 훈5등 팔괘장을 받았다.
또한 백우용은 여성 계몽을 위한 창가집인 『이십세기청년여자창가(二十世紀靑年女子唱歌)』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창가집은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여성용 창가집으로, 당시 남성 지식층의 여성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백우용은 한국 초기 서양 음악의 발전과 전통 아악의 오선보 채보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손자 백성빈의 증언에 따르면 키는 약 165cm였다고 한다. 관련 서적으로는 김용범·김한아의 『대한제국 군악대장 백우용』(하늬바람, 2025)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