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빙산 전투는 672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백빙산(白氷山)에서 당나라군과 맞붙어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는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군사적 충돌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배경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역을 자국의 지배 아래 두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670년부터 당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당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던 고구려 유민 부흥 세력과 연대하게 되었다.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가 지원한 병력과 합세하여 예성강 부근에서 당군에 맞섰다.
전투 경과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672년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의 지원군과 합세하여 예성강 부근의 백빙산(白氷山)에서 당나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위키백과의 백빙산 전투 항목에 따르면,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 모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는 격렬한 전투 끝에 신라군이 승리하였으나 신라 측의 피해도 컸다. 동북아역사넷에서는 이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패배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전투 결과에 대한 서술이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전투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 부흥군은 이듬해인 673년 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세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상당수의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로 투항하거나 각지에서 패배하면서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지명 및 기록상의 쟁점
백빙산(白氷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수산(白水山)'으로, 신라본기 문무왕 12년조에는 '백수성(白水城)'으로, 《자치통감》에는 '백수산(白水山)', 《신당서》에는 '천산(泉山)'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 지명들이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으며, 그 위치로는 현재의 황해남도 신원군 동북 지역, 예성강 하류, 재령강 주변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역시 이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현황
백빙산 전투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내 역사 연구 기관의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실재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다만 전투의 세부 경과와 정확한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원전 기록 간의 차이로 인해 일부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