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상 존속살해 사건은 1994년 5월 19일 새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단독주택에서 박한상(朴漢相, 당시 23세)이 친부모인 박순태 씨(당시 48세)와 조모 씨 부부를 흉기로 살해한 뒤 주택에 방화하여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다. 대한민국에서 계획적 패륜 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개요
1994년 5월 19일 새벽 1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3층 단독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19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에 의해 불은 20여 분 만에 진화되었으나, 지하실에서 임시 거주 중이던 집주인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초 단순 화재 사건으로 처리되었으나, 시신이 병원 영안실로 옮겨진 후 부검 과정에서 부부의 몸에서 다수의 자상(刺傷)이 발견되면서 살인 및 방화 사건으로 전환되었다.
피해자 및 범인
피해자 박순태 씨는 대한한약협회 서울시지부장을 역임한 한약업자로, 당시 약 100억 원(현재 가치 기준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였다. 범인은 피해자 부부의 장남인 박한상으로,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유학 중이었으며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상태였다.
범행 수법 및 증거
부검 결과, 아버지 박순태 씨의 시신에서는 안면부, 복부, 등 등 총 51군데의 자상이 발견되었고, 특히 심장 부위가 18회 집중적으로 찔렸다. 어머니 조모 씨의 시신에서는 총 46군데의 자상이 발견되었으며, 턱 아래 목 부위가 집중적으로 공격당했다. 두 사람을 합해 총 100여 회에 달하는 다발성 자창(刺創), 즉 '오버킬(overkill)' 상태였다.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사인은 다발성 자창에 의한 과다출혈이었으며, 연기 흡입 질식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 피해자들이 사망한 이후에 방화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결정적 증거로는 박한상이 화상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가 "머리에 상처는 없으나 머리카락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고 진술한 점, 그리고 박한상의 종아리에서 발견된 치흔(齒痕, 물린 자국)이 어머니의 치열과 일치한 점이 꼽힌다. 이는 어머니가 임종 직전 아들의 다리를 물어 남긴 흔적으로 추정되었다.
범행 동기
박한상은 미국 유학 중 도박에 빠져 상당한 금액의 빚을 졌고, 아버지에게 추가 자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질타를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유산을 조기에 상속받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범행 사흘 전부터 잡화점에서 등산용 칼(일명 '람보칼')을 구매하고 주유소에서 휘발유 8리터를 구입하는 등 사전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당일에는 성매매 업소를 방문한 뒤 귀가하여 부모가 잠든 밤 12시경 범행을 실행했다. 증거 인멸을 위해 옷을 모두 벗은 채 맨몸에 침대커버를 두르고 범행한 점, 범행 후 샤워로 몸에 묻은 혈흔을 씻어냈으나 머리는 감지 않은 점 등이 수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수사 및 재판
경찰은 초기에는 아들을 용의자로 의심하기 어려워했으나, 형사들의 지속적인 수사 끝에 범행 자백을 받아냈다. 박한상은 일단 자백한 후 검찰 송치 이후에는 "경찰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유명 변호사였던 황산성(전 환경부 장관)이 무료 변론을 자처했으나, 박한상의 반성 없는 태도와 거짓말을 확인한 후 변호를 포기했다.
1995년, 서울고등법원은 박한상에게 존속살인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1995년 8월 22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또한 민법상 상속인 결격에 해당하여 유산을 단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황
박한상은 현재까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형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박한상은 장기 복역 중인 사형수 중 한 명으로 분류된다. 사건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여러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다.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오렌지족'(부모의 재력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젊은 층)에 대한 비판적 담론, 해외 유학생들의 도피성 유학 문제, 무분별한 상속 문화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 일각에서는 '유산 남기지 않기'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영화 및 다큐멘터리 등 여러 매체에서 재조명되었으며, 일부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