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양 (朴普陽, 1504년 ~ 158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귀암(歸巖), 자는 화숙(和叔)이다.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인물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복권되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될 정도로 깨끗한 관리로 평가받았다.
생애
박보양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박수화(朴守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일찍이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27년(중종 22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31년(중종 26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특히 김안국과 김정국(金正國) 형제로부터 학문적 가르침을 받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길렀다.
1545년(인종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그는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전횡에 반대하다가 고산(高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박보양은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시간을 보냈다.
1565년(명종 20년)에 사화가 수습되면서 복권되어 다시 관직에 올랐다. 선조 즉위 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 도승지(都承旨) 등 승정원의 요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년)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 좌찬성(左贊成) 등 고위직에 이르렀다.
그는 벼슬살이 내내 청렴함을 잃지 않았고, 특히 1579년(선조 12년)에는 청백리로 녹선되어 당대 최고의 모범적인 관리로 인정받았다.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여러 비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증(贈)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평가 및 유산
박보양은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한 사람으로,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올바른 학문과 덕행을 쌓았다. 을사사화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며, 복권된 이후에는 고위 관직에 올라 청백리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학문적 성취와 도덕적 청렴함은 후대에 귀감이 되었다.
관련 항목
- 김안국
- 을사사화
- 선조
- 밀양 박씨
- 청백리
각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보양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703)
- 조선왕조실록
외부 링크
- 네이버 지식백과 - 박보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3162&cid=46623&categoryId=46623)
분류:
- 조선의 문신
- 1504년 태어남
- 1583년 죽음
- 밀양 박씨
- 청백리
- 을사사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