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습격(프랑스어: prise de la Bastille)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평가된다.
배경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세 말기부터 시작된 만성적인 재정 악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 독립 혁명 지원에 따른 막대한 재정 부담, 반복된 흉작으로 인한 물가 폭등 등으로 서민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은 전체 인구의 약 2%에 불과했으나 프랑스 전체 토지의 30% 이상을 소유하면서 면세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재정난 해결을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 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심의와 표결 방식을 두고 갈등이 발생하였다. 신분별 표결 방식이 채택될 경우 제1신분과 제2신분이 연대하여 2대 1로 유리해지므로 제3신분(평민)이 불리했다. 6월 17일, 평민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루이 16세는 회의장을 폐쇄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를 탄압하려 하였으나, 평민 대표들은 6월 20일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하였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스스로를 '제헌의회'로 선언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1789년 7월 11일, 루이 16세는 개혁 성향의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하고 국경 지역에 주둔하던 군대를 파리로 소환하였다. 이는 제헌의회에 대한 무력 탄압 의도로 해석되었다.
습격 경과
네케르 파면 소식과 군대 집결 소식을 접한 파리 민중과 부르주아들은 격분하였다. 7월 12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보훈병원(앵발리드)으로 몰려가 무기와 탄약 지급을 요구하였다. 7월 14일, 군중은 보훈병원에서 약 3만 정의 소총을 빼앗고 탄약 확보를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하였다.
바스티유는 본래 백년전쟁 시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으나,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면서 절대왕정의 압제적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 수감되어 있던 죄수는 7명에 불과했으나, 시민들에게는 화약과 탄약이 보관된 중요 거점이었다.
시민 대표단이 바스티유 사령관 베르나르 르네 주르당 드 라우네 후작을 찾아가 무기와 화약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협상이 지속되는 사이 군중의 수는 계속 불어났다. 오전 11시 30분경, 일부 남성들이 담을 넘어 진입하여 안마당으로 통하는 도개교를 내렸고, 군중이 요새 안으로 밀려들었다. 겁에 질린 수비병이 발포하면서 시민들과 수비대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드 로네이는 대포 발사를 준비하였으나 패배를 직감하고 바스티유를 폭파하려 하였으나 수비대 측 군인에 의해 저지되었다. 결국 도개교가 내려지고 군중이 요새를 장악하였다. 이 전투에서 시민 측 사망자 98명, 부상자 73명이 발생하였고, 수비대 측은 사망자 1명, 부상자 3명이었다.
이후 경과
드 로네이는 붙잡혀 시청으로 이송되었으나 흥분한 군중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시장 자크 드 플레셀도 같은 날 살해되었다.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던 7명의 죄수(위조범 4명, 가족 요청으로 감금된 정신질환자 1명, 루이 15세 암살 시도자 1명, 소위 '변태 백작' 1명)가 석방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 16세가 "폭동인가?"라고 묻자, 측근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아니오 폐하, 이것은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전해진다. 루이 16세는 파리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네케르를 복직시켰으며, 7월 18일에는 직접 파리를 방문하여 새로운 시 정부와 시민 민병대(국민방위대)를 승인하였다.
바스티유 습격 소식은 프랑스 각 도시로 확산되었고, 각지에서 부르주아 중심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어 시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7월 14일은 현재 프랑스의 국경일(혁명 기념일, Fête nationale française)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