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부르크 축제(독일어: Wartburgfest)는 1817년 10월 18일과 19일, 독일 튀링겐 지방 아이제나흐 인근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열린 역사적인 학생 집회이다. 이 축제는 독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 해방 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이들은 1815년 빈 회의 이후 독일 통일의 꿈이 좌절된 데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민주적 개혁은 지체되었고, 각국 정부는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15년 6월 12일, 예나 대학교의 학생들은 독일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우르부르셴샤프트(Urburschenschaft)'라는 조직을 창설하였다.
축제의 개최
축제는 종교개혁 300주년(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문 게시)과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장소로 선정된 바르트부르크 성은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후 은신했던 곳으로, 그곳에서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약 500명의 개신교 독일 학생들이 참가했으며, 예나 대학의 교수들(디트리히 게오르크 폰 키제어, 로렌츠 오켄, 하인리히 루덴,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 등)도 참여했다. 베를린, 브레슬라우, 에를랑겐, 기센, 괴팅겐, 그라이프스발트, 하이델베르크, 킬, 쾨니히스베르크, 라이프치히, 마르부르크, 로스토크, 튀빙겐 등 13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모였다. 오스트리아 대학으로의 초청은 메테르니히 정부에 의해 차단되었다.
축제의 진행
축제는 바르트부르크 성의 기사회관에서 열렸으며, 마르틴 루터를 자유 투사로 조명하는 연설과 국가 통일의 길에 대한 발언이 이어졌다. 행사는 개신교 예배와 유사한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해방 전쟁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 건배가 이루어졌다.
책 불태우기 사건
공식 축제가 끝난 후, 급진적 성향의 학생들은 '비독일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서적들과 상징물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여기에는 나폴레옹 법전, 프로이센 경찰 법령, 그리고 여러 반동 문학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이 행위는 이후 1933년 나치의 책 소각 행위의 정당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영향과 결과
바르트부르크 축제는 독일 통일과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요한 정치적 시위였다. 이 축제는 독일 국기의 색상인 검정-빨강-금색(뤼초프 자유군단의 제복 색상에서 유래)이 국가적 상징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보수 세력의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1819년 칼스바트 결의(Carlsbad Decrees)를 통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는 명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832년 함바흐 축제(Hambacher Fest)가 유사한 방식으로 개최되었으며, 1848년 독일 혁명 기간 중 두 번째 바르트부르크 축제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