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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네스 1세

바르다네스 1세(Vardanes I)는 파르티아 제국의 제25대 샤한샤(재위: 서기 38년~46년, 또는 40년~47년)이다. 그의 이름 '바르다네스'(Vardanes)는 중세 이란어 단어 'Wardān'(장미)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과 가계

출생 연도는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버지는 파르티아 제국의 전임 샤한샤인 아르타바노스 2세이며, 고타르제스 2세는 그의 형제였다.

즉위와 내전

아르타바노스 2세가 사망한 후(서기 38년경)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확실하지 않으나, 초기에는 형제인 고타르제스 2세와 파르티아를 분할하여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르다네스 1세는 서부 파르티아를, 고타르제스 2세는 동부 파르티아를 각각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다.

즉위 1년 후, 고타르제스 2세의 잔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바르다네스 1세를 초청하였고, 이에 바르다네스 1세는 고타르제스 2세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고타르제스 2세는 다하에(Dahae) 부족 지역으로 피신한 후 반격을 준비하였다. 이후 두 형제는 귀족들이 제3자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시적으로 화해하였으나, 내전은 지속되었다.

셀레우키아 정복

바르다네스 1세는 부왕 아르타바노스 2세 치세 말기부터 반란 상태에 있던 티그리스 강변의 도시 셀레우키아(Seleucia)를 포위 공격하였다. 서기 40년에서 43년 사이에 셀레우키아를 함락시켰으며, 셀레우키아 조폐국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하였다. 또한 셀레우키아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고 도시 자체의 동전 주조 특권을 박탈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크테시폰(Ctesiphon)이 티그리스 강 좌안의 왕실 거소로서 발전하였으며, 로마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바르다네스 1세를 크테시폰의 설립자로 언급하였다.

로마 제국과의 관계

바르다네스 1세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로마 군단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베리아 출신의 미트리다테스 왕이 로마의 지원을 받아 통치하자,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바르다네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바르다네스 1세는 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 이자테스(Izates)에게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이자테스가 로마의 보복을 우려하여 거절하자 직접 아디아베네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고타르제스 2세와의 최종 대결

서기 43년경, 고타르제스 2세가 귀족들의 선동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하자, 바르다네스 1세는 회군하여 에린드 강(Erind)에서 형제와 대치하였다. 전투에서 바르다네스 1세가 승리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드 강(Sindes, 현재의 테젠 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더 이상의 진격을 거부하여 그 자리에 승리 기념비를 세우고 귀환하였다. 고타르제스 2세는 박트리아로 피신하여 저항을 계속하였다.

최후

서기 46년(또는 47년), 바르다네스 1세는 사냥을 하던 중 귀족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의 사후 오랜 기간 대립하였던 형제 고타르제스 2세가 파르티아 전체의 군주로 자리잡았다.

역사적 평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바르다네스 1세를 "인간성은 부족하지만 젊고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매우 선택받은 지배자"로 평가하였다. 그의 주화는 서기 40년에서 47년까지 발행된 것이 확인되며, 이는 그의 통치 기간을 추정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또한 그는 철학자 아폴로니우스 티아나(Apollonius of Tyana)의 후원자로 언급되며, 그에게 인도로의 안전 통과를 보증하는 편지를 제공하여 인도-파르티아 지배자 프라오테스(Phraotes)를 만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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