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전쟁(프랑스어: Guerre des farines, 영어: Flour War)은 1775년 4월부터 5월까지 프랑스 왕국 북부, 동부, 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을 가리키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폭동은 곡물 가격과 그에 따른 빵 가격의 급등에 뒤이어 발생하였으며, 당시 빵은 대중의 주요 식량원이었다.
배경과 원인
구체제(Ancien Régime) 시기 프랑스에서 빵은 가난한 농민들의 주된 식량이었으며, 왕은 신하들의 식량 공급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경찰은 곡물 시장을 엄격히 규제하여 빵의 품질과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고 곡물 사재기를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규제 시스템은 '도덕 경제(moral economy)'라고 불렸다.
1774년,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는 중농주의(physiocracy) 경제 사상의 영향을 받아 1774년 9월 13일 곡물 자유 무역을 확립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기존의 경찰 규제를 폐지하였다. 1775년 봄, 수확기 이전 시점에 곡물 비축량이 소진되고 새로운 작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자유화 이후 곡물 소유자들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저장하거나 흉작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풍작 지역에서 대량으로 구매하는 투기 행위를 벌였고, 이는 전국적인 가격 상승과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악천후와 흉작, 그리고 1773~1774년 경찰이 왕실 창고의 공공 곡물 공급을 중단한 것도 폭동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전개 과정
1775년 4월부터 5월까지 17일간 파리 분지(Paris Basin)를 중심으로 약 180건에서 최대 313건의 분쟁이 기록되었다. 폭동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수출 지역에서 노동계층이 자발적으로 상인들에게 '공정한 가격'을 강요하고 빵집과 창고를 약탈하는 형태였다. 둘째, 도시 지역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창고와 빵집이 공격받았다. 셋째, 강과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곡물 운송 자체를 방해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5월 2일과 3일에는 반란군이 베르사유 궁전 앞까지 도달하였고, 파리의 빵집이 약탈당했다.
진압과 수습
튀르고는 두 가지 조치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였다. 첫째, 25,000명의 군대를 투입하여 162명을 체포하고 폭동 참가자 2명을 사형에 처하는 진압을 단행하였다. 둘째, 필요한 지역에 식량 공급을 조직하고 공급 소유자들에게 정해진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구호 조치를 시행하였다. 대부분의 소요는 1775년 5월 11일경에 종료되었으며, 완전한 수습에는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
역사적 의의
밀가루 전쟁은 단순한 기아로 인한 폭동을 넘어 프랑스 혁명의 전조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구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었고, 왕과 신하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든 계기로 분석된다. 튀르고의 경제 자유화 실험은 대중의 신뢰를 잃었으며, 기근에 대한 공포와 '기근 협약(Pacte de Famine)' 음모론은 이후 1789년 레베이옹 폭동, 대공포(Grande Peur), 베르사유 행진 등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의 배경이 되었다. 역사학자 E.P. 톰슨과 찰스 틸리 등은 이 폭동에서 경제적 도덕성과 공공의 식량 정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 점을 주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