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아센 3세(불가리아어: Михаил Асен III)는 1323년부터 1330년까지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황제)로 재위한 군주이다. 일반적으로 미하일 시슈만(Михаил Шишман)으로도 불리며, 시슈만 왕가의 창건자이다. 그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280년에서 129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출신과 즉위
미하일 아센 3세는 비딘의 데스포트(지방 영주) 시슈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이반 아센 2세의 손녀이자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테르의 딸이었다. 1292년 아버지 시슈만과 세르비아 왕 스테판 밀루틴 사이의 평화 조약 이후, 미하일 시슈만은 밀루틴의 딸 안나 네다와 약혼하였고 1298년 또는 1299년에 결혼하였다. 그는 전임 차르인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및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와 먼 사촌 관계였다.
1323년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귀족들에 의해 불가리아의 차르로 선출되었다. 즉위 후 그는 아센 왕가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아센 왕가의 후손이었기에 차르로 선택되었으며, 그의 즉위를 새로운 왕조의 시작보다는 아센 왕가의 연속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즉위 직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의 혼란을 틈타 북동부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얌볼, 루소카스트로, 안키알로, 소조폴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다. 미하일 아센 3세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안드로니코스 3세를 퇴각시켰으나, 비잔티움군은 불가리아의 수비대 교체 과정에서 플로브디프를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1324년까지 미하일 아센 3세는 북부 및 북동부 트라키아 지역을 대부분 되찾고 보이실을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1324년 가을, 미하일 아센 3세는 안나 네다와 이혼하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나이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비잔티움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결혼의 배경에는 세르비아의 마케도니아 확장에 따른 불가리아-세르비아 관계 악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27년 비잔티움 제국에서 내전이 재개되자 미하일 아센 3세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편에 서서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와도 협상하여 군사 지원을 조건으로 영토와 금전을 얻어내는 등 기회주의적 외교를 펼쳤다. 1328년에는 트라키아를 침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3세와의 평화 조약 갱신으로 마무리되었고, 1329년에는 소조폴과 안키알로 사이에서 '지속적인 평화와 영구적인 동맹'을 체결하였다.
세르비아와의 관계 및 벨버즈드 전투
1324년 안나 네다와의 이혼 이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안나 네다는 아들들과 함께 세르비아로 피신하여 오빠인 스테판 데찬스키(스테판 우로시 3세)에게 의탁하였다. 비잔티움 내전에서 불가리아가 안드로니코스 3세를, 세르비아가 안드로니코스 2세를 각각 지원하면서 양국은 대립하였다.
1330년, 미하일 아센 3세는 약 15,000명의 군대와 왈라키아 및 몰다비아의 지원군을 이끌고 세르비아로 진군하였다. 1330년 7월 28일, 벨버즈드(현재의 큐스텐딜) 근교에서 세르비아군과 교전하였다. 양측은 증원군을 기다리기 위해 하루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세르비아는 약속을 깨고 스테판 두샨이 이끄는 1,000명의 중장기병이 도착하자 불가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보급품을 찾기 위해 군대가 흩어져 있던 상황에서 미하일 아센 3세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불가리아군은 대패하였다.
사망과 유산
미하일 아센 3세의 사망 경위는 여러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비잔티움 황제이자 역사가인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에 따르면 그는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곧 사망하였다고 한다. 다른 비잔티움 사가는 그가 3일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아 있었고 4일째 사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세르비아 연대기에는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말에 짓밟혀 사망하였다고 전하며, 15세기 초 불가리아 학자 그리고리 참블라크는 스테판 두샨에게 포로로 잡힌 후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시신은 스타로나고리차네의 성 게오르기 교회에 안장되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정력적이고 야망 있는 군주였으나, 기회주의적이고 일관되지 못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려 했던 마지막 중세 불가리아 통치자였으며,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의 군사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였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내부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였고, 즉위 당시 상실했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그의 사후 차르위는 아들 이반 스테판에게 계승되었다가 조카 이반 알렉산더르가 차지하였으며, 이반 알렉산더르는 미하일 시슈만의 정책을 전환하여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의 문장은 1999년과 2005년에 발행된 불가리아 2레바 지폐 뒷면에 도안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