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미켈레 다 체세나

미켈레 다 체세나(이탈리아어: Michele da Cesena, 라틴어: Michael de Caesena, 1270년경~1342년 11월 29일)는 중세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자 신학자이다. 본명은 미켈레 푸스키(Michele Fuschi)로 알려져 있으며, 1316년부터 1328년까지 프란치스코회 총봉사자(Minister General)를 역임하였다.

생애

미켈레 다 체세나는 이탈리아 체세나(Cesena) 근교에서 태어났다. 초년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후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였고, 1316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볼로냐에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성경과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대한 여러 주석을 저술하였다.

1316년 5월 31일 나폴리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부재 중이었음에도 총봉사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아시시에서 수도회 회칙 개정을 위한 총회를 소집하였고, 같은 해 8월 21일 볼로냐에서 『그라비 쿠아 프레모르』(Gravi qua premor)라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청빈 논쟁

미켈레 다 체세나는 14세기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청빈 논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아무런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복음적 청빈(evangelical poverty)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교황 요한 22세(재위 1316~1334)는 프란치스코회의 재산 소유권을 교황청이 대신 보유해 주던 기존의 법적 장치를 철회하고, 수도사들이 재산 소유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였다.

1322년 페루자에서 소집된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지상의 재화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이단이 아니며 기독교의 참된 교리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칙서 『쿰 인테르 눈눌로스』(Cum inter nonnullos)를 발표하여 이 입장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아비뇽 체류와 탈출

1327년, 교황 요한 22세는 미켈레를 아비뇽으로 소환하였다. 미켈레는 꾀병을 부리며 지체하다가 결국 아비뇽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교황에 의해 억류되어 아비뇽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1328년 5월 볼로냐에서 열린 총회에서 미켈레는 부재 중이었음에도 총봉사자로 재선출되었다.

1328년 5월 26일에서 27일 사이의 밤, 미켈레는 오컴의 윌리엄, 보나그라치아 다 베르가모 등과 함께 아비뇽 교황청을 탈주하였다. 이들은 에그모르트 항구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바이에른 공작)의 보호 아래 피사로 이동하였다.

파문과 말년

교황 요한 22세는 1328년 6월 미켈레를 파문하고 총봉사자 직에서 해임하였다. 1329년 파리 총회는 게랄두스 오도니스를 새로운 총봉사자로 선출하였고, 1331년 페르피냥 총회는 미켈레를 수도회에서 완전히 제명하고 궐석으로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미켈레는 이후 뮌헨에서 루트비히 4세의 보호 아래 생활하며 복음적 청빈을 주장하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교황 요한 22세 사후 후임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재심을 청구하기도 하였으나, 133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342년 11월 29일 뮌헨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곳의 프란치스코회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1359년 사후 복권되었다.

저술

미켈레 다 체세나의 주요 저술로는 1330년에 작성된 『아펠라티오 모나켄시스』(Appellatio monacensis)가 있으며, 그 외에도 교황 요한 22세의 칙서들에 대응하는 여러 항변문을 작성하였다.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오컴의 윌리엄의 저작에 포함되어 전승되었다.

문화적 참조

미켈레 다 체세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 1980)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작품 속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의 생애 일부가 서술된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