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와 잇코 잇키(三河一向一揆, みかわいっこういっき)는 1563년(에이로쿠 6년)부터 1564년(에이로쿠 7년)에 걸쳐 미카와국(三河国, 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에서 발생한 잇코 잇키(一向一揆)이다. 당시 미카와를 지배하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정토진종(浄土真宗) 혼간지파(本願寺派)의 승려와 문도(門徒)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가월(伊賀越え)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삼대 위기(三大危機)' 중 하나로 평가된다.
배경
미카와 서부의 야하기가와(矢作川) 유역은 가마쿠라 시대 이래로 정토진종의 교세가 강력하게 확장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혼쇼지(本證寺), 조구지(上宮寺), 쇼만지(勝鬘寺)의 이른바 '미카와 삼사(三河三ヶ寺)'를 비롯한 혼간지파 사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슈고시후뉴(守護使不入, 영주의 관리가 간섭할 수 없는 특권)를 인정받아 사실상의 치외법권 지역인 사내정(寺内町)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이에야스의 아버지)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도 이 특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후, 이에야스는 오카자키성(岡崎城)으로 귀환하여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을 추진하고 미카와 국내 통일을 목표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에야스는 영지 지배 강화를 위해 이들 사원의 슈고시후뉴 특권을 부정하고 조세와 군역을 부과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혼간지파 교단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발단
발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삼주일향종난기(三州一向宗乱記)》에서는 혼쇼지에서의 발단설을 첫째로 들고, 이어 조구지에서의 설을 두 가지 제시하는 등 여러 설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주요 설로는 다음이 있다.
- 혼쇼지 발단설: 에이로쿠 5년(1562년) 혼쇼지에 침입한 범법자를 니시오 성주 사카이 마사치카(酒井正親)가 체포한 것이 슈고시후뉴 특권 침해로 간주되어 이듬해 정월 일규(一揆)가 발발하였다는 설(《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
- 조구지 발단설: 에이로쿠 6년(1563년), 이에야스의 가신 스가누마 사다아키(菅沼定顕)가 조구지 부근에 성채를 쌓고 사원 내의 병량미를 징수한 것에 항의하여 문도들이 봉기하였다는 설(《도쿠가와실기(東照宮御実紀)》). 다만 스가누마 사다아키라는 가신의 실재 여부는 불확실하다.
혼쇼지 제10대 구세이(空誓, 렌뇨의 증손)는 조구지, 쇼만지와 함께 격문을 날려 혼간지 문도들을 소집하고 스가누마 씨의 성채를 습격하였다.
전개
이 일규에는 정토진종 문도였던 마쓰다이라 씨의 가신들뿐만 아니라, 요시라 씨(吉良氏), 아라카와 씨(荒川氏) 등의 유력 호족, 이마가와 씨의 잔당, 그리고 사카이 다다나오(酒井忠尚) 등 이에야스의 노신(老臣)까지 가담하였다. 이에야스의 가신단도 신앙과 주군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분열되어,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와타나베 모리츠나(渡辺守綱), 하치야 사다쓰구(蜂屋貞次) 등이 일규 측에 가담하였다. 이에야스 자신도 총탄을 두 발 맞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개별 격파 전략을 통해 전세를 만회하였고, 1564년 1월 15일(율력)의 바토하라(馬頭原) 합전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점하였다.
수습과 결과
1564년 2월경, 이에야스는 일규 측과 화의를 체결하였다. 화의의 조건으로 이에야스는 일규 참가자의 사면, 슈고시후뉴 특권의 원상회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기세문(起請文)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규 측이 무장 해제한 후, 이에야스는 '원래대로(元の通り)'란 사원이 세워지기 전의 상태(들판)로 되돌리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며 혼간지파 사원들에 대해 타파(他派)・타종(他宗)으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한 사원은 파각(破却)하였다. 또한 개종에 응하지 않는 승려와 문도들을 국외 추방하였다.
이에야스는 일규에 가담했던 가신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려 가신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미카와 국은 이후 약 19년간(1583년까지) 혼간지 교단 금지의 땅이 되었다. 다만 혼다 마사노부 등 일부 가신은 출분(出奔)하였으며, 일규에 참가한 대부분의 가신이 가중 통제를 위해 추방 처분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미카와 잇코 잇키는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영지 지배와 가신단 통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도쿠가와 씨의 영국 확대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