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렌타로(일본어: 水野 錬太郎, 1868년 2월 3일 ~ 1949년 11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문부대신, 귀족원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아키타 번의 번사 집안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내무성에 들어갔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9년에는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베른 협약에 일본 대표단으로 참석하였고, 이후 일본 저작권법 제정에 기여하였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냈다. 이 시기는 3·1운동 직후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함께 조선에 부임하였다. 부임 당시 남대문역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던진 폭탄에 휘말렸으나 부상에 그쳤다. 재임 기간 중 전화 통신 인프라를 확충하는 등 식민지 통치 행정을 수행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지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발생 당시 내무대신으로 재임 중이었으며,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조장하고 이에 대한 진정을 소홀히 하여 조선인 학살(간토 대학살)을 방조한 책임이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지진 다음 날 고토 신페이에게 내무대신 자리를 넘겼다.
이후 1924년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에서 다시 내무대신을,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였다. 문부대신 재임 시절에는 제국대학의 좌익 성향 교수들을 숙청하고 급진 좌익 학생 단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A급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1947년 9월 1일 재판 없이 석방되었다. 194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