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文孝公)은 한국 역사에서 여러 인물에게 부여된 시호(諡號)로, '문(文, 문덕)'과 '효(孝, 효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호는 왕이나 고위 관료가 사망한 후 그 행적에 따라 국가에서 내려지는 이름으로, 문효공은 이 시호를 받은 인물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동일한 시호가 여러 인물에게 사용되었으므로, 문효공이라는 호칭만으로는 특정 인물 한 명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없다.
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河演)
가장 널리 알려진 문효공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河演, 1376~1453)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이다. 고려 말의 학자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봉상시 녹사(奉常寺祿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세종 대에 이르러 예조참판, 대제학,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445년(세종 27) 우의정, 1447년 좌의정, 1449년 영의정에 올라 삼정승을 두루 거쳤다. 재상으로 재임하는 20여 년 동안 청렴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세종의 명으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편찬하였고, 허조(許稠)와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3년 사망한 후 1454년(단종 2) 문종(文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로 문효(文孝)가 내려졌다. 그의 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함께 그려진 부부 초상화(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백산서원(柏山書院) 등에 봉안되어 있으며,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의 문신 이곡(李穀)
고려 후기의 문신 이곡(李穀, 1298~1351) 역시 문효공(文孝公)의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고려와 원(元)나라를 오가며 활동하였고, 아들은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이다. 저서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신라의 효자 손순(孫順)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시조인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의 인물로,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난한 살림에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아이를 묻으려다 석종(石鍾)을 얻었다'는 효행 설화가 전해진다. 후대에 문효공(文孝公)의 시호가 추증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시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 밖의 문효공
이 외에도 조선 전기의 문신 어효첨(魚孝瞻, ?~?), 조선 전기의 문신 윤효손(尹孝孫, 1431~1503), 조선 후기의 문신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소설 『구운몽』의 저자) 등이 문효공의 시호를 받았다. 또한 조선 정조(正祖)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는 세자 시절 요절하여 '문효'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이는 '문효공'이 아닌 '문효세자'로 불린다.
이와 같이 '문효공'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인물에게 사용된 시호이므로, 문맥에 따라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