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文體反正)은 조선 후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당시 유행하던 한문 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환원시키고자 추진한 일련의 문체 정책을 가리킨다. '문체반정'이라는 용어는 정조 당시에 사용된 표현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고교형(高橋亨)의 연구 이래 통용되기 시작한 명칭이다. 당시에는 '비변문체(丕變文體)', '문체지교정(文體之矯正)', '귀정(歸正)', '문체순정(文體醇正)' 등의 표현이 사용되었다.
배경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서는 명(明)나라 말기와 청(淸)나라 초기 중국 문인들의 문집, 패관잡기(稗官雜記)류의 소설 및 잡서들이 유입되면서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이러한 새로운 문체의 대표적 저작으로, 소설식 표현과 해학적 기법을 구사한 '연암체(燕巖體)'로 불리며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개
정조는 문체의 흥망이 정치 현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패관잡기와 명말청초 문집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를 배격함으로써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직접적 계기는 1792년(정조 16년), 이동직(李東稷)이 정조의 총애를 받던 남인 시파(時派) 이가환(李家煥)의 문체를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이가환을 두둡하면서도, 불순한 문체의 근원이 박지원과 그의 《열하일기》에 있다고 지목하고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87년 이상황(李相璜)과 김조순(金祖淳)이 한원(翰苑)에서 《당송백가소설》 등을 보다가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잡서를 보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1791년에는 서학(西學)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서양학을 금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구체적 조치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시행하였다.
-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박종악(朴宗岳)에게 패관소기 및 일체의 중국 서적을 사오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 주자(朱子)의 어류(語類)를 뽑은 《주자선통(朱子選統)》, 당송팔대가의 고문을 뽑은 《팔자백선(八子百選)》 등을 출간하여 고문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 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성대중(成大中)의 문장을 모범적인 고문으로 규정하였다.
- 이옥(李鈺)의 과체 문장에 패관체 기풍이 있다고 논책하고,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 조정 문신 중 문체가 불순하면 교수(敎授)에 천거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남공철(南公轍)·이상황·김조순·심상규(沈象奎) 등이 견책을 받고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쳤다.
의의와 평가
문체반정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공격으로부터 남인 시파를 보호하고자 한 정조의 계획된 여론 조성 정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정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체에 대한 관권의 개입은 18세기 활발하게 움직이던 문예 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한편, 문체반정은 청나라의 문자옥(文字獄), 일본 에도 막부의 이학금지(異學禁止) 등과 함께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주자학 중심의 사상 통제 움직임의 일환으로 분석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