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김씨(茂朱金氏)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김성(金晟)이다.
《무오보(戊午譜)》 세록에 따르면, 시조 김성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43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등과하여 국자감 제주(祭主)를 역임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뒤 무주백(茂朱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무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다만 세록에는 고려 우왕 3년(1377)에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고 무주백에 봉해졌다는 일설도 함께 기록하고 있어, 시조의 관직 이력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무주 김씨가 광산김씨(光山金氏)와 같은 연원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나, 이는 문중 측의 주장으로 확인되며 객관적인 고증이 완전히 확립된 것은 아니다.
본관인 무주는 전라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삼한시대에 주계(朱溪)는 마한에 속했고, 무풍(茂豊)은 변진의 감문국(甘文國)에 속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 고려를 거치며 행정 구역이 여러 차례 개편되었고, 조선 개국 후 1414년(태종 14)에 주계와 무풍을 통합하여 무주현으로 개칭하였다. 무주는 현대에 이르러 무주군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주 김씨의 주요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기록되어 있다. 2세 김생려(金生麗)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판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3세 김규(金葵)는 세종 때 등과한 후 승정원 좌부승지와 예조참의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6세 김선지(金善之)는 집현전 교리에 이르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아우 김한지 및 아들 김유인과 함께 화를 입어, 그 충절로 동학사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또한 12세 김석여는 충청 지역의 저명한 성리학자였고, 14세 김광찬은 효행으로 정조로부터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고 전한다.
무주 김씨의 분파로는 사정공파, 도계공파, 창암공파, 참봉공파, 사곡공파, 통덕공파, 교리공파 등이 있다.
과거 급제자와 관련해서는 문과 급제자는 없고 무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원시 급제자로는 김병민, 김양래가, 진사시 급제자로는 김사용, 김석래, 김위가 기록되어 있다.
집성촌은 충청남도 아산시, 보령시, 서산시, 홍성군 일원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선지 일가가 단종 복위 사건으로 화를 입은 뒤 가족들이 충청도 내포 지역(보령, 홍성, 예산, 아산, 당진, 서산, 태안 등)에 흩어져 살게 된 것에서 이러한 집성촌 형성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인구는 1985년 당시 전국에 397가구 1,691명이었고, 2000년에는 707가구 2,255명이었다. 2015년 현재 전국의 무주 김씨는 2,422명이며, 그중 경기도에 754명으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무주 김씨(茂朱金氏)와 독음이 같은 무주 김씨(務州金氏)도 별도로 존재한다. 이는 조선조에 목사를 지낸 김정구(金淀救)를 시조로 하며, 김알지의 후손으로 전한다. 두 집단은 한자 표기상 茂朱와 務州로 구분되므로 혼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주 김씨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주요 근거 자료로는 《무오보》,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주부 읍지》 등이 있다. 시조 김성의 행적과 관련된 일부 주장은 문중 전승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어, 학술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사실과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