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無神論, atheism)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입장을 의미한다.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16세기 프랑스에서 유래하였으며, 영어 'atheist'는 1566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단어는 '신이 없음'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아테오스)에서 기원하였다. 무신론의 역사는 유신론만큼이나 오래된 논의의 흐름을 지니고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과 사상적 전통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고대 시기
철학적 무신론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경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신화 대신 자연 현상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시도하였다. 크세노파네스(기원전 6세기)는 전통적인 신관을 비판하였고,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세기)는 태양을 신이 아닌 불덩어리로 설명했다가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최초의 유물론 철학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기원전 5세기)의 원자론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들은 세계의 형태와 발전을 원자의 움직임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멜로스의 디아고라스(기원전 5세기)는 역사상 최초로 '무신론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00년경)는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신들이 인간사에 관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그의 사상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기원전 1세기)를 통해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피론주의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신의 존재 문제에 대해 판단을 보류할 것을 권고하였다.
고대 인도에서도 무신론적 사상이 전개되었다. 차르바카 학파는 감각적 인식만을 인정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와 자이나교 역시 창조주 신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무신론은 종종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무신론' 혐의로 고소되어 사형당하였으며, 초기 기독교인들도 로마의 공인된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신론자로 취급되어 박해를 받았다.
중세 시기
중세 유럽에서 무신론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사회에서 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Quinquae viae)이나 캔터베리의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은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타당성을 인정한 사례에 해당한다.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븐 알-라완디(9세기)와 같은 학자가 종교적 예언 개념을 비판하였으며, 아부 바크르 알-라지(865-925)와 시인 알-마아리 등이 종교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종교 비판에 관한 출판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주로 모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수반하였다. 프랑스의 에티엔 돌레는 1546년 화형당하였고, 이탈리아의 줄리오 체사레 바니니는 1619년 화형당하였다.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역시 무신론자로 고발되었으며, 폴란드 귀족 카지미에시 위슈친스키는 1689년 무신론을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명시적 무신론자는 덴마크의 미티아스 크누첸(1646-1674 이후)으로, 1674년 무신론에 관한 세 권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689년에는 폴란드 귀족 카지미에시 위슈친스키가 《De non-existentia Dei》(신의 부재에 관하여)라는 철학 논문을 통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계몽주의 시대
18세기 계몽주의는 무신론 사상이 체계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프랑스 가톨릭 사제 장 메슬리에(1664-1729)는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논문에서 기독교적 신과 이신론적 신 모두를 거부하였으며, 이는 근대 최초의 무신론 전념 저서로 평가된다. 앙리 디트리히 돌바크는 1770년 《자연의 체계》를 통해 고전 시대 이래 최초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볼테르, 장자크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신론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이들의 사상은 무신론의 확산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에 기반하여 전통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였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자크 헤베르와 피에르 쇼메트에 의해 이성숭배가 무신론에 기반하여 고안되었으나, 이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최고존재숭배에 의해 중단되었다.
19세기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서유럽 일부 국가에서 무신론이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합리주의와 자유사상 운동을 통해 무신론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퍼시 비시 셸리는 1811년 《무신론의 필요성》을 익명으로 출간하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이는 영어로 작성된 최초의 무신론 출간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신을 인간 이상의 투사(投射)로 설명하며 무신론적 사상을 전개하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논제를 수용하여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종교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유명하며, 기독교적 가치 체계의 붕괴와 허무주의의 부상을 논하였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주 개념에 과학적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종교를 인간의 심리적 투사로 설명하였다.
20세기
20세기 무신론은 논리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세속적 인본주의 등 다양한 철학적 전통 속에서 인정을 받았다. 버트런드 러셀, A. J. 에이어 등은 종교적 신앙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20세기에는 국가 무신론의 사례도 나타났다. 소련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 종교를 억압하였으며, 1925년 무신론자 동맹을 창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종교에 대한 억압이 이루어졌다.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의 통치 하에 1967년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가 되었으며, 종교적 준수를 완전히 금지하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시기에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가 되었고, 문화혁명 기간 동안 종교 시설과 관행이 억압되었다.
21세기
21세기 초반 서구 세계에서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무신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등으로 대표되는 '신무신론(New Atheism)'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유신론과 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통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무신론 단체들은 자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촉진하고, 무종교인의 인권과 사회적 인정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