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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남송 전쟁

몽골-남송 전쟁(蒙宋戰爭)은 13세기 몽골 제국(이후 원나라)과 중국 남송 왕조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송원전쟁(宋元戰爭)으로도 불리며, 영어권에서는 Mongol conquest of the Song dynasty로 지칭된다. 이 전쟁은 몽골 제국의 대외 정복 전쟁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으며, 몽골이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시기 및 구분

전쟁은 일반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차 전쟁(1235년~1241년)은 오고타이 칸(Ögedei Khan) 시기에 시작되었다. 제2차 전쟁(1258년~1259년)은 몽케 칸(Möngke Khan)이 주도하였다. 제3차 전쟁(1267년~1279년)은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이 원나라를 건국한 이후 진행되어 남송의 멸망으로 끝났다. 전체 전쟁 기간은 약 44년에 달한다.

배경

1234년, 몽골과 남송은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후 남송 조정은 북송 시절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화북 지역으로 군대를 진군시켰다(단평의 입락, 端平入洛). 이에 몽골 제국은 이를 동맹 위반으로 간주하고 1235년 쿠릴타이에서 남송 공격을 결정하였다.

제1차 전쟁(1235~1241)

오고타이 칸의 명령으로 몽골군은 사천(四川), 양양(襄陽), 회남(淮南) 등 여러 방면으로 남송을 침공하였다. 초기에는 성도(成都)와 양양이 함락되는 등 몽골군이 우세를 보였으나, 남송의 명장 맹공(孟珙)이 강릉(江陵) 방어에 성공하고 양양을 수복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군은 일단 후퇴하였다.

제2차 전쟁(1258~1259)

몽케 칸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세 방면에서 남송을 공격하였다. 몽케 칸이 직접 이끄는 주력군은 사천으로, 쿠빌라이는 악주(鄂州)로, 우량카다이(Uriyangkhadai)는 운남에서 담주(潭州)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1259년, 몽케 칸이 합주(合州)의 조어성(釣魚城) 공격 중 사망하면서 몽골군은 다시 철수하였다. 이 전투는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원정에도 영향을 미쳐, 훌라구(Hulagu)가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하면서 몽골의 서진이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3차 전쟁(1267~1279)

쿠빌라이 칸은 내전(아리크부카와의 톨루이 내전)을 수습한 후 본격적인 남송 정벌에 나섰다.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몽골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집중적으로 포위 공격하였다(양양 공방전, 1268~1273). 몽골군은 일 칸국에서 도입한 평형추 투석기(회회포, 回回砲)를 사용하여 1273년 번성을 함락시켰고, 이어 양양도 항복받았다.

양양 함락 이후 몽골군은 장강(長江)을 따라 동진하여 1275년 정가주(丁家洲) 전투에서 남송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1276년 2월, 바린 바얀(Bayan of the Baarin)이 이끄는 몽골군은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을 함락시키고 공제(恭帝)의 항복을 받아냈다.

남송의 최후와 애산 전투(1279)

임안 함락 이후에도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은 어린 황제들을 옹립하고 남부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1279년 3월 19일, 광동(廣東) 애산(崖山) 앞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해전(애산 전투)에서 원나라 군대가 남송 함대를 격멸하였다. 육수부는 마지막 황제 소제(少帝)를 업고 바다에 투신 자결하였고, 장세걸도 태풍으로 익사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결과 및 영향

몽골 제국(원나라)의 승리로 중국 대륙 전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유목 제국에 의해 통일되었다. 원나라는 남송의 옛 영토 주민(남인, 南人)을 최하위 계급으로 분류하는 민족 차별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전쟁은 몽골 제국의 대외 원정 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며, 남송은 몽골에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보인 상대였다. 전쟁 과정에서 화약 무기(진천뢰, 화창 등)와 평형추 투석기 등 다양한 공성 병기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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