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 1882년 6월 16일 ~ 1967년 3월 5일)는 이란의 정치인, 법학자, 작가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이란의 제60·62대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페르시아어 표기로는 محمد مصدق이며, 영문 표기로는 Mohammad Mossadegh, Mohammad Mosaddeq 등 여러 이형이 존재한다.
생애 초기와 교육
모사데그는 1882년 이란 테헤란에서 고위 관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르자 헤다야톨라 아슈티아니는 카자르 왕조의 재무장관이었고, 어머니 말렉 타지 나짐-에스-살타네는 카자르 왕조의 개혁 군주였던 아바스 미르자의 손녀이자 파트 알리 샤 카자르의 증손녀였다. 1892년 아버지가 콜레라로 사망한 후, 나세르 알딘 샤 카자르로부터 '모사데그-오스-살타네'라는 칭호를 받았다.
1909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하여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스위스 뇌샤텔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1913년)를 취득하였다. 이는 유럽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이란인이었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치 경력
모사데그는 1905~1907년 이란 입헌 혁명 시기에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4세의 나이로 이스파한 지역구에서 이란 의회(마즐리스)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법적 연령(30세) 미달로 의석을 승인받지 못했다. 이후 1920년 파르스 주 주지사, 1921년 재무장관, 1922년 아제르바이잔 주 주지사, 1923년 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1925년 레자 칸(훗날 레자 샤 팔라비) 지지자들이 카자르 왕조를 폐위하고 팔라비 왕조를 수립하려 하자, 모사데그는 이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이 행위가 1906년 이란 헌법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새 정권과의 의견 불일치로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1941년 레자 샤가 영국에 의해 퇴위당하고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즉위한 후, 1944년 모사데그는 다시 의회에 진출했다. 1949년에는 19명의 동료들과 함께 국민전선(Jebhe Melli)을 창설하여 민주주의 확립과 이란 정치에서의 외세 개입 종식을 목표로 활동했다.
총리 재임과 석유 국유화
1951년 4월 28일, 마즐리스의 투표(79대 12)로 모사데그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의 정부는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도입했다. 실업 보상 제도 도입, 공장 노동자에 대한 복지 혜택, 농민의 강제 노동 해방, 1952년 토지개혁법 통과 등을 포함한다.
가장 중요한 정책은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AIOC, 후일 BP)의 국유화였다. 1951년 3월, 모사데그는 1993년까지 유효할 예정이었던 석유 양허 계약을 취소하고 회사 자산을 몰수했다. 이는 훗날 다른 중동 산유국들도 채택한 자원 민족주의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에 영국 정부는 사실상의 봉쇄와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페르시아만에 해군력을 증강했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이란을 제소했다. 영국의 보이콧으로 이란의 석유 생산량은 1950년 66만 4,000배럴에서 1952년 2만 7,000배럴로 약 96% 감소하여,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임과 재임용
1952년 7월, 모사데그는 전쟁부 장관 임명권을 요구했으나 샤가 거부하자 사임했다. 후임 총리로 아흐마드 카밤이 임명되자, 국민전선과 투데당(공산당) 등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5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시위(30 티르 항쟁) 끝에 샤는 카밤을 해임하고 모사데그를 재임명했으며, 전쟁부 장관 임명권을 양보했다.
재임용된 모사데그는 의회로부터 6개월간의 비상 권한(독재령 권한)을 부여받았고, 이후 1953년 1월 12개월 연장을 승인받았다. 그는 샤의 개인 예산을 삭감하고, 외교관과의 직접 소통을 금지했으며, 왕실 토지를 국가에 환원하고 샤의 정치적 활동을 하던 여동생 아슈라프 팔라비를 추방하는 등 군주 권한을 제한했다.
1953년 쿠데타와 실각
영국 정부는 석유 산업 통제권 상실에 대해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고, 1952년 10월 모사데그가 영국을 적으로 선언하고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미국의 협력을 구했다. 1953년 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행정부는 영국과 공조하여 모사데그 축출 계획(에이젝스 작전, Operation Ajax)에 합류했다.
1953년 8월, 미국 CIA와 영국 MI6의 지원을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 주도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는 초기 실패했으나,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여 모사데그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3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된다. 모사데그는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반역죄로 3년간의 독방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말년과 사망
1956년 8월 석방된 후, 모사데그는 아마다바드의 자택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1966년 암(암종) 진단을 받고 테헤란 메르흐르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나, 1967년 3월 5일 테헤란 나즈미에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치적 논란을 우려한 당국은 그의 시신을 공공 묘지 대신 자택 거실에 매장했다.
역사적 평가와 유산
모사데그는 이란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반식민주의 지도자로 평가된다. 1951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953년 쿠데타는 이후 이란의 정치 발전에 큰 후퇴를 가져왔으며,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반미 감정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쿠데타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2013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기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쿠데타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영국 정부는 모사데그 전복에 대한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란 내에서 모사데그는 개혁파와 세속주의 성향 반체제 인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며, 팔라비 왕조로의 복고를 반대하는 세력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다만 당시 강력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아야톨라 아볼-가셈 카샤니의 지지 철회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우려 등 복합적인 요인이 그의 정치적 기반 약화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