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러시아어: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우크라이나어: Мой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ький, 1873년 1월 2일(율리우스력 1873년 1월 14일) ~ 1918년 8월 30일)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정치인이다.
개요
우리츠키는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체르카시(현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에서 유대계 리트바크(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했고, 어머니가 그를 홀로 키웠다. 빌라 체르크바 체육관을 다니며 교사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생애
초기 정치 활동
키예프의 성 블라디미르 대학교(현 키예프 대학교) 법학부를 1897년 졸업했다. 재학 중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에 가입했고, 정치 문헌을 수입·유통하는 지하 조직을 운영했다. 1897년 불법 등사기 운영 혐의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유대인 노동조합(분트)에서 활동했으며, 1903년 RSDLP가 분열되자 멘셰비키에 합류했다. 1905년 혁명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활동하여 두 번째 유배형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파르부스와 함께 제국 보안 기관에 혁명 요원을 침투시키는 활동을 했다.
망명과 귀환
1914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레프 트로츠키가 편집한 당 기관지 《나셰 슬로보》(Notre Parole)에 기고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로 돌아와 메즈라이온치(지구간 조직) 그룹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직전인 1917년 7월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혁명과 체카 수장
10월 무장 봉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 체카(비밀경찰) 수장으로 임명되어 귀족, 군 장교, 경쟁 사회주의자,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등 볼셰비키 반대파를 탄압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좌파 공산주의자' 진영에 섰고, 이에 항의하여 1918년 초 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191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으로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자 중앙위원회 활동을 재개했다.
사형제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원회가 승인한 사형 집행 영장에는 서명했다.
암살
1918년 8월 30일, 제정 러시아군 생도였던 레오니드 카네기세르가 페트로그라드 체카 본부 밖에서 우리츠키를 암살했다. 이는 카네기세르의 친구이자 장교였던 블라디미르 페렐츠바이크의 처형에 대한 보복이었다.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는 사회혁명당의 파니 카플란에 의한 레닌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두 사건은 볼셰비키가 '적색 테러' 정책을 공식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츠키는 페트로그라드의 화성의 들판(마르소보 폴레)에 명예롭게 안장되었다.
사후
1918년부터 1944년까지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광장은 '우리츠키 광장'으로 불렸다. 러시아에는 현재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多处 존재한다. 1933년 소련 우표에도 그의 초상이 도안되었다.
평가
우리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페트로그라드 체카의 초대 수장으로, 혁명 초기 공포 정치(적색 테러)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를 '혁명적 페트로그라드의 로베스피에르'로 비유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