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코(스페인어: morisco, 포르투갈어: mourisco)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던 시대에 이슬람교(무슬림)에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사람과 그 후손을 가리키는 역사적 명칭이다.
어원 및 용어의 변천
'모리스코'라는 낱말은 12세기 카스티야 문헌에서 이미 형용사로 등장하였으며, 스페인어 '모로(moro, 무어인)'에서 파생된 말로 '작은 무어인' 또는 '무어인 계통의'라는 뜻을 지닌다. 16세기 전반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이전 무슬림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이슬람교를 계속 믿는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의미로 전환되었다. 모리스코들은 스스로를 단순히 'muslimes(무슬림)'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 배경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이후 약 700년간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지역을 지배하였다(알안달루스).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멸망하면서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다. 초기에는 그라나다 조약을 통해 무슬림에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1499년 추기경 시스네로스의 강제 개종 조치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1501년 카스티야 왕국은 무슬림에게 개종 혹은 추방을 강요하였다. 1502년 이사벨 1세 여왕은 카스티야 전역에서 이슬람교를 공식 금지하였다. 아라곤 연합왕국에서는 1526년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칙령에 따라 무슬림 개종이 강제되었다.
종교적 상황
강제 개종 이후 상당수의 모리스코는 공개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면서도 비밀리에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는 위장 개종자(crypto-Muslim)로 살아갔다. 1504년에는 오란 법안(Oran fatwa)이라는 이슬람 법률 의견이 유포되어 생존을 위해 외형적으로 기독교를 따르는 것을 허용하는 종교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한편 상당수 모리스코는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그라나다에서는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아 무슬림에게 살해된 순교자들도 있었다.
모리스코 반란과 추방
펠리페 2세는 1567년 모든 모리스코에게 이슬람 관습과 아랍어 사용, 전통 의복 착용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이에 저항하여 1568~1571년 알푸하라스 반란(모리스코 반란)이 일어났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진압되었고, 이후 그라나다 지역에서 8만~9만 명의 모리스코가 카스티야 각지로 분산 이주당했다.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는 모리스코 추방 포고를 발령하였고, 1609년(발렌시아)부터 1614년(카스티야)까지 약 27만~30만 명의 모리스코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전체 인구의 약 4%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추방은 아라곤 연합왕국(현재의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지방)에서 가장 강력하게 집행되었으며, 대다수 모리스코는 오스만 제국이나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으로 정착하였다. 일부는 이탈리아(특히 리보르노)나 프랑스 등 기독교 지역에 남기도 했다.
추방 이후
최근의 역사 연구에 따르면 추방령이 실제로는 완전히 집행되지 않았으며, 특히 카스티야 왕국 지역에서는 상당수의 모리스코가 추방을 피하거나 추방된 후에도 스페인으로 귀환한 것으로 나타난다. 학자에 따라 추방을 면한 모리스코의 비율을 5%에서 40%까지 다양하게 추정한다. 1727년 그라나다에서 비밀 이슬람 신앙 유지를 이유로 한 마지막 대규모 재판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모리스코 정체성은 점차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모리스코 추방은 특히 발렌시아 지방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많은 마을이 완전히 버려졌다.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모리스코 중 일부는 바르바리 해적에 합류하거나, 살레 공화국(Corsary Republic of Salé)을 세우기도 했으며, 1591년에는 모로코 술탄을 위해 사하라를 건너 팀북투와 니제르 지역을 정복한 용병 부대의 기원이 되었다(아르마족).
유전학적 유산
현대 인구유전학 연구는 이베리아 반도 주민들에게서 북아프리카 기원의 유전적 표지(E-M81, U6, Macro-haplogroup L 등)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빈도로 나타남을 보여주며, 이는 이슬람 지배 시기의 정착과 모리스코 추방 이후에도 상당수가 잔류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