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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もうり もとなり)는 일본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다이묘로, 오늘날의 히로시마현 서부에 해당하는 아키국(安芸国)을 본거지로 활동하였다. 1497년 4월 16일 아키국의 호족 모리 히로모토(毛利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571년 7월 6일 요시다 고리야마성(吉田郡山城)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5세이다.

모리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의 후손으로 전해지나, 모토나리 당대까지는 아키국의 일개 고쿠진(国人, 지방 호족)에 불과하였다. 어머니를 5세 때, 아버지를 10세 때 잃었으며, 형 오키모토(興元)가 일찍 사망한 후 조카 고마쓰마루(幸松丸)의 후견인이 되었다가 고마쓰마루가 9세에 병사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가독 상속 과정에서 동생 아이오 모토쓰나(相合元綱)와 그를 지지하는 중신들을 숙청한 '아이오 사건'이 발생하였다.

모토나리는 오우치 가문(大内氏)과 아마고 가문(尼子氏)이라는 두 대세력 사이에서 교묘한 외교 줄타기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였다. 차남 모토하루(元春)를 깃카와 가문(吉川氏)에, 삼남 다카카게(隆景)를 고바야카와 가문(小早川氏)에 각각 양자로 보내 이 두 가문을 실질적으로 흡수함으로써 아키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모리 양천(毛利両川)' 체제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1551년 오우치 가문에서 스에 하루카타(陶晴賢)가 주군 요시타카(義隆)를 살해하는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이 발생하자, 모토나리는 일단 스에에게 복종하는 척하다가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 스에 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오우치 가문의 영지를 흡수하며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1566년에는 아마고 가문의 본성 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을 함락시켜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말년에는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시노하라 나가후사(篠原長房),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 등이 결성한 반모리 포위망에 직면하였고, 아마고 부흥군의 활동에도 시달렸다. 1563년 장남이자 적자였던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가 급사하자 손자 데루모토(輝元)가 가독을 이었으나 실권은 모토나리가 계속 쥐고 있었다.

모토나리는 '모신(謀神)'이라 불릴 정도로 모략에 능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전략은 단기간의 화려한 계략보다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공작과 이간책을 통해 전쟁 전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평생 금주하였으며, 정실인 미이 부인(美伊の方)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측실을 두지 않은 애처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들들에게 보낸 많은 서찰이 남아 있어 가족을 향한 잔소리와 당부가 현대에 널리 알려져 있다.

'세 화살의 교훈' 일화는 모토나리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나, 이는 이솝 우화에서 유래한 이야기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모토나리 버전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백만일심(百万一心)'이라는 말 역시 모토나리와 관련하여 전해지나, 이에 대한 당대 사료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19세기 초에 발견된 석비의 진위가 의심받고 있다.

모토나리의 후손인 모리 가문은 에도 시대에 조슈번(長州藩)을 다스렸으며,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배출하였다. 사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급인 정1위(正一位)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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