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과 흑인 여인(영어: Black Woman with Peonies, 프랑스어: Négresse aux pivoines 또는 Jeune femme aux pivoines)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가 1870년 늦봄에 제작한 유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동일한 주제로 두 점이 제작되었으며, 한 점은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에, 다른 한 점은 프랑스 몽펠리에의 뮤제 파브르(Musée Fabre)에 소장되어 있다. 두 점 모두 캔버스에 유채로, 크기는 약 60.3cm × 75.2cm이다.
작품 배경 및 구성
바지유는 1862년 파리로 이주하여 샤를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등을 만나 인상주의 운동의 초기 형성에 참여했다. 그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를 깊이 존경했으며, 이 그림은 마네의 1863년작 《올랭피아》(Olympia)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된다. 《올랭피아》에서 흑인 하인(모델명 로르)이 백인 창녀에게 모란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지유는 이 구도를 차용하면서도 흑인 여성을 단독 주인공으로 전면에 배치한 점에서 차별화된다.
워싱턴 버전의 그림에서 흑인 여성은 한 손에 모란 꽃다발을 들고 다른 팔에 꽃바구니를 안은 채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몽펠리에 버전에서는 동일한 여성이 화병에 꽃을 꽂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배경은 밝은 회색이며, 꽃바구니에는 모란 외에도 튤립, 장미, 라일락, 수선화 등 계절별 꽃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모델
그림의 모델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바지유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모델을 "une négresse superbe"(뛰어난 흑인 여성)라고 언급했다. 동일한 모델이 바지유의 다른 작품 《La Toilette》(1869–1870)에도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녀가 착용한 머리 스카프와 귀걸이는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가 1868년 파리 유학 시절 그린 《Female Model》의 모델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술사적 의의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에서 흑인 여성의 재현 방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당시 오리엔탈리즘 회화에서 흑인 여성은 종종 이국적 대상이거나 성적 대상으로 그려지거나, 백인 주인공의 보조적 인물로만 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지유는 흑인 여성을 꽃과 동등한 비중으로 배치하고, 얼굴과 표정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존재감을 부여했다. 미술사학자 드니즈 머렐(Denise Murrell)은 이 그림이 흑인 여성에 대한 당대의 전형적 묘사를 탈피한 진보적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바지유는 이 작품을 완성한 지 몇 달 후인 1870년 11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