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明成皇后 暗殺未遂 事件)은 1895년(고종 32년) 7월, 조선의 정치인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 일부가 명성황후(민비)를 비밀리에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배경
1895년 4월,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결탁하기 시작했으며, 김홍집 내각을 축출하고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명성황후는 1894년 여름부터 급진개화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경과
1895년 7월, 박영효는 명성황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하여 왕비 암살을 계획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신과 가깝다고 여겨 뜻을 알렸다. 그러나 유길준은 박영효의 암살 계획을 고종에게 밀고하였다. 고종은 이에 궁궐의 방비를 강화하고 급진개화파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7월 5일,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은 박영효와 상의하여 왕궁 수비 교체를 구실로 실력 행사를 계획하였고, 7월 6일 거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인 사사키(佐佐木某)가 이 내용을 탐지하여 한재익(韓在翼)에게 필담으로 누설시켰고, 한재익은 심상훈을 통해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고종은 7월 6일 김홍집에게 박영효 일파 체포령을 내렸다.
체포와 도주
당시 경무사였던 이윤용은 박영효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고도, 이웃이었던 박영효에게 몰래 도망치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7월 7일 아침 경무청 관리들이 박영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박영효는 이미 양복으로 갈아입고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나와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도주한 뒤였다. 신응희, 이규완 등도 함께 도주하였다.
결과
암살 미수가 실패한 후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 무렵 흥선대원군, 이준용 일파와 함께 별도로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8월(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과 손잡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며, 이 사건이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따라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은 1895년 7월 박영효 주도의 암살 시도가 유길준의 밀고로 미수로 끝난 사건을 가리키며, 같은 해 10월 발생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는 별개의 사건이지만, 이후 흥선대원군-유길준 일파가 같은 목적을 달성한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연관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