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제1제국(Primer Imperio Mexicano)은 1821년부터 1823년까지 존재한 멕시코 최초의 독립 정부이자 입헌 군주국이다. 이후 1864년부터 1867년까지 존속했던 막시밀리아노 1세 치하의 제2제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제1제국'으로 지칭된다.
배경과 성립
멕시코 제1제국은 스페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과정에서 수립되었다. 1810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의 봉기로 시작된 멕시코 독립 전쟁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한편 스페인 본국에서는 1820년 자유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1812년 헌법을 부활시키면서 식민지 엘리트들의 기득권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군 장교 출신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독립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 등과 연합하여 1821년 2월 이괄라 계획(Plan de Iguala)을 수립하였다.
이괄라 계획은 세 가지 핵심 원칙('삼중 보장')을 담고 있었다. 첫째, 멕시코는 스페인 왕자가 통치하는 독립된 입헌 군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 모든 멕시코인이 출신 민족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점, 셋째,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인된 유일한 종교로서 특권을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이 계획을 바탕으로 삼중 보장군(Army of the Three Guarantees)이 결성되었고, 1821년 9월 마지막 스페인 부왕 후안 오도노후가 코르도바 조약에 서명하면서 멕시코의 독립이 공식화되었다.
제국의 수립
독립 당시 계획은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7세가 멕시코의 왕위를 겸임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가 멕시코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왕실 구성원의 즉위를 허용하지 않자, 이투르비데의 지지자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822년 5월 18일 멕시코시티에서 군중 시위가 발생하였고, 다음 날 의회는 67표 대 15표로 이투르비데를 황제로 선출하였다. 다만 이 투표는 법적 정족수인 102명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투르비데는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하여 1822년 7월 21일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미주 대륙에서 스페인 제국의 부왕령 출신 지역 가운데 유일하게 군주제를 채택한 사례였다.
영토
제1제국의 영토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아메리카 영토를 계승하였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 지역(텍사스,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과 과테말라 총독부 관할이던 중앙아메리카 지역(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이 포함되었다. 쿠바, 산토도밍고, 필리핀 등의 지역은 제외되었다. 이 시기에 멕시코는 역사상 최대 영토를 보유하였다.
정치적 갈등과 몰락
제국의 수립 이후 의회와 황제 사이에는 권한 범위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대법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군사 재판소 설치 등을 둘러싼 분쟁이 이어졌다. 1822년 8월에는 공화정 수립을 꾀한 의원들의 음모가 적발되어 15명의 의원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투르비데는 1822년 10월 31일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국가 제도 헌정회(National Institutional Junta)로 대체하였다. 또한 재정난 해결을 위해 강제 차관과 지폐 발행 등을 시행하였으나, 이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1822년 12월, 베라크루스에 주둔하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공화정 수립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비센테 게레로와 니콜라스 브라보 등이 황제파에서 이탈하였다. 1823년 2월 1일 카사 마타 계획(Plan of Casa Mata)이 선포되면서 군대가 의회 복원을 요구하였고, 대부분의 지역이 이에 동참하였다.
종말
1823년 3월 4일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재소집하였으나 상황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3월 19일 이투르비데는 퇴위를 발표하였다. 이후 권력은 임시 공화정부로 이양되었고,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중앙아메리카 지역은 1823년 7월 연방공화국으로 독립하였으며, 치아파스주만 멕시코에 잔류하였다. 이후 멕시코는 1824년 제1연방공화국(United Mexican States)이 수립되었다.
제1제국은 약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였으나, 멕시코 역사에서 독립 직후의 정치적 전환기와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