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브래디(Mathew B. Brady, 1822년경~1896년 1월 15일)는 19세기 미국의 사진가로, 미국 역사상 가장 초기이자 가장 유명한 사진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의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브래디는 뉴욕주 워런 카운티(레이크조지 인근)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1822년에서 1824년 사이로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생전 공식 문서에서는 아일랜드 출생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16세 무렵 화가 윌리엄 페이지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새뮤얼 모스(Samuel F. B. Morse) 밑에서 은판사진(다게레오타이프) 기술을 익혔다. 모스는 미국에서 다게레오타이프 기법을 개척한 인물로, 브래디는 초기 사진 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844년 브래디는 뉴욕시 브로드웨이와 풀턴 스트리트 모퉁이에 자신의 첫 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후 1849년에는 워싱턴 D.C.에, 1852년에는 뉴욕에 더 큰 스튜디오를 추가로 개업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다수 촬영했으며, 1850년에는 《저명한 미국인들의 화랑》(The Gallery of Illustrious Americans)이라는 초상집을 출판했다. 브래디는 존 퀸시 애덤스에서 윌리엄 매킨리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19명 중 18명의 사진을 촬영, 복제 또는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일한 예외는 그가 사진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재임 중 사망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다. 특히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진은 미국 5달러 지폐와 링컨 1센트 동전의 도안에 사용되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브래디는 전쟁 자체를 포괄적으로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 약 20명의 사진사 팀(대표적으로 알렉산더 가드너, 티모시 H. 오설리번 등)을 조직하고, 각자에게 이동식 암실을 지급하여 전장에 파견했다. 브래디 자신은 주로 워싱턴에 머물며 작업을 총괄·감독했으며, 직접 전장에 나간 경우는 드물었다. 불런 전투, 앤티텀 전투 등 일부 전장에서는 그가 직접 촬영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사진 기술은 피사체가 정지된 상태를 요구했기 때문에 실제 전투 장면 자체를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862년 10월 브래디는 뉴욕의 갤러리에서 앤티텀 전투의 사체 사진을 전시한 《앤티텀의 죽은 자들》(The Dead of Antietam)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미국 대중이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접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전쟁 기록 사업은 브래디에게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초래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약 10만 달러(현대 가치로 약 200만 달러 이상)를 투자하여 1만 장 이상의 사진 건판을 제작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가 그의 사진을 구매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브래디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뉴욕 스튜디오를 매각하고 파산을 선언해야 했다. 1875년 의회가 2만 5천 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의 재정 상태는 회복되지 못했다. 시력 악화와 1887년 아내의 사망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도 그를 괴롭혔다. 브래디는 1896년 1월 15일 뉴욕 프레스비테리언 병원의 자선 병동에서 빈털터리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 비용은 제7뉴욕보병연대 참전 용사들이 부담했으며, 그는 워싱턴 D.C.의 콩그레셔널 묘지에 안장되었다.
브래디의 사진 유산은 남북전쟁에 대한 대중과 역사학계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스튜디오와 소속 사진사들이 제작한 수천 장의 사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브래디는 사진 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며, 1968년에는 국제사진명예의전당에 미국인 최초로 헌액된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브래디의 사진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그가 아니라 그의 조수들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래디의 갤러리에서 제작된 모든 사진에는 "Photo by Brady"라는 표기가 붙었지만, 이는 개인적인 촬영을 의미하기보다 스튜디오 차원의 브랜드 표기였으며, 이러한 관행은 "기업 신용 표기(corporate credit line)"의 선구적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부 조수들은 브래디가 개별 사진사에게 촬영자 표기를 허용하지 않은 점에 불만을 품고 스튜디오를 떠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