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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메디 학살

말메디 학살(영어: Malmedy massacre)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12월 17일, 벨기에 말메디(Malmedy) 인근 보네(Baugnez) 교차로에서 독일 무장친위대(Waffen-SS)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미군 포로 84명을 집단 살해한 전쟁 범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 1944년 12월 16일~1945년 1월 25일)의 일부로서 발생하였다.

배경

1944년 12월, 나치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안트베르펜(Antwerp) 항구를 탈취하기 위해 아르덴 지역에서 대규모 반격 작전(라인 강 감시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에서 제6 SS 기갑군 소속 제1 SS 기갑사단(LSSAH)의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중령이 지휘하는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이 기갑 선봉을 맡았다. 파이퍼 전투단은 뫼즈(Meuse) 강 도하를 목표로 신속한 진격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경과

1944년 12월 17일 정오 무렵,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보네 교차로에 도달하였다. 이때 미군 제285 야전포병관측대대(285th Field Artillery Observation Battalion) B 포대 소속 차량 30여 대로 구성된 수송대가 같은 교차로를 통과하던 중이었다. 독일군 선봉 부대가 수송대의 선두와 후미 차량을 파괴하여 이동을 저지하였고, 화력과 병력에서 열세였던 미군 병사들은 항복하였다.

파이퍼 전투단의 기갑 차량들이 리뉴빌(Ligneuville) 방면으로 계속 진격하는 가운데, 무장친위대 병사들은 항복한 미군 포로 약 120명을 인근 농경지에 집결시킨 뒤 기관총 사격을 가하였다. 사격에서 살아남은 포로들에 대해서는 머리에 총격을 가하는 확인 사살이 이루어졌다. 일부 미군 병사들은 시체인 척하거나 도주하여 생존하였으며, 인근 카페로 피신한 포로들은 건물에 불을 질러 살해되었다. 최종적으로 84명의 미군 포로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43명이 생존하여 미군 점령 하의 말메디 시내로 탈출함으로써 학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범 재판

전후, 이 사건은 다하우 재판(Dachau trials, 1945~1947)의 일부인 말메디 학살 재판(1946년 5월~7월)에서 다루어졌다. 재판 결과, 제6 SS 기갑군 사령관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 상급대장, 파이퍼 전투단장 요아힘 파이퍼, 제1 기갑대대장 베르너 푀치케(Werner Poetschke) 등이 지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디트리히와 파이퍼를 포함한 43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실제로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이들은 1950년대 중반에 석방되었다.

영향

말메디 학살 소식은 미군 내에 빠르게 확산되어 독일군, 특히 무장친위대에 대한 적개심과 전투 의지를 고조시켰다. 이 사건 이후 미군 내에서는 SS 대원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비공식 명령이 퍼지기도 하였으며, 1945년 1월 1일에는 미군 제11기갑사단 소속 병사들이 독일 국방군 포로 약 80명을 집단 살해한 슈노뉴 학살(Chenogne massacre)이 발생하는 등 보복적 성격의 전쟁 범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같이 보기

  • 벌지 전투
  • 요아힘 파이퍼
  • 다하우 재판
  • 슈노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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